읽고본느낌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샌. 2021. 6. 24. 11:03

서울대병원에서 종양내과 전문의로 근무하고 있는 김범석 선생이 쓴 책이다. 암 환자를 담당하는 의사로서 만난 여러 죽음과 사연을 소개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성찰하게 한다. 부제가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Hodie Mihi, Cras Tibi" - 로마 시대 때 공동묘지 입구에 적혀 있었다는 글귀인데,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뜻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갈래의 인생길을 걸어가지만 끝은 똑같다. 오늘 누군가의 죽음이 내일 나의 죽음이 된다. 타인의 죽음은 바로 나의 죽음을 대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례들이 남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며, 그래서 너무나 절절이 가슴을 울린다.

 

여러 사례 중에서 중환자실에서 마지막을 맞은 어느 할머니의 모습이 처절하다. 최선을 다해달라는 가족들의 요청에 할머니는 의식이 없는 채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버티고 있었다. 가족들은 끝내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글의 한 부분을 옮긴다.

 

얼마 후 버티고 버티던 할머니의 심장은 이제는 좀 쉬고 싶다며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렸다.

"선생님, 어레스트예요!"

다들 할머니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가족들이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료진은 CPR(심폐소생술)을 해야만 했고, 기계적으로 몰려온 사람들이 CPR을 시작했다. 인턴 선생님이 흉부 압박을 시작하자 뚝 소리가 나며 할머니의 복장뼈가 푹 꺼졌다. 

"150줄 차지 해주세요. 모두 떨어지세요!"

펑!

제세동기라 불리는 전기충격기가 환자의 몸에 가해지자 펑 소리와 함께 환자의 늙고 작은 체구가 들썩였다.

"아직 안 돌아왔네요. 200줄 차지!"

펑!

노구가 다시 한 번 허공에 떠올랐다.

"인턴 선생님, 계속 컴프레션 하세요."

흉부를 압박할 때마다 뚝뚝 소리가 났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더 부러질 갈비뼈가 없어지자 이제는 부러진 갈비뼈가 서로 맞닿아 뼈 갈리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렀다.

"인턴 선생님... 살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눈치 없는 인턴이 최선을 다해 흉부압박을 하자 주치의는 적당히 살살하라고 주의 아닌 주의를 주었다. 어차피 '쇼피알(환자는 가망이 없으나 어쩔 수 없이 보여주기[Show] 위해서 하는 CPR이라는 뜻'인데 제대로 CPR을 할 이유가 없었다. 갈비뼈만 더 부러져 봐야 나중에 가족들 보기에 좋지 않았다. 이미 열려 버린 눈동자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면서 인턴은 최대한 살살 흉부를 압박했다.

 

그리고 선생은 이렇게 묻는다.

 

"가족들과 의료진은 환자에게 현대의학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고 환자는 너무 힘들게 저승길로 떠났다. 나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꾸 되묻게 되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고."

 

선생은 의사의 입장에서 우리나라 의료 현실을 고발한다. 공장식 박리다매 진료 환경이 왜 생기는지 설명을 들어보면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슬픈 것은 이 같은 시스템이 우리를 길들인다는 것이다. 비정상이 오래되면 무엇이 정상인지 알기 어려워진다. 시스템은 더욱 공고해지고 이 시스템 속에 있다 보면 환자나 보호자도, 의사도 컨베이어벨트처럼 3분에 한 명씩 진료실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현대 병원 시스템에서 인간적인 진료가 가능한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2016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사망한 28만 명 중 21만 명이 병원에서 사망했고, 말기 암 환자는 90%가 병원에서 임종을 맞는다고 한다.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은 대개 비슷해서, 사망 두 달 전에 평생 쓸 의료비의 절반 정도를 쓴다. 미사(未死), 아직 죽지 않는 자라는 말이다. '살아 있는'보다 '아직 죽지 않은' 편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 병원에는 수두룩하다. 그런 이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길고도 무겁다.

 

2017년의 서울대병원 통계로는 항암치료와 사망까지의 평균적인 시간 차이가 한 달이라고 한다. 죽기 한 달 전까지 항암치료에 매달리고 있다는 말이다. 일찍 호스피스 완화 치료를 선택하는 사람은 10%가 되지 않는다. 반면에 미국은 암 환자들이 평균적으로 사망 6개월 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다는 통계가 있다. 즉 항암치료가 의미 없는 것으로 판단되면 남은 6개월은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갖고 호스피스 완화 치료를 받는다. 그렇다고 미국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일까?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과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 두려운 것이다. 죽음의 단계에 이르면 내 의지나 의식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기 전에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인공호흡기 사용이나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혀두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보다도 죽음의 때가 다가오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세가 먼저 필요한 게 아닐까. 생명 연장 테크닉만 발달한 현대의학에 내 몸을 맡겨도 될까. 존엄한 죽음은 존엄한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생명을 경시하는 세상에서 존엄한 죽음을 기대하기란 뜬구름 잡는 얘기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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