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무서운 의학사

샌. 2021. 6. 28. 11:01

인류가 지금과 같은 의학 지식과 의료 시스템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많은 도전과 시행착오가 있었는지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19세기 이전에는 의사들이 환자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해악을 끼친 면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현대 의학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겠다.

<무서운 의학사>는 '무서운 병', '무서운 사람들', '무서운 의사', '무서운 의료'의 네 파트로 되어 있으며 짧은 에피소드로 소개하는 이재담 작가가 쓴 서양 의학사다.

책에 소개된 몇 개를 골라본다.

# 1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1194~1250)는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으로 유명한 왕이었다. 그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절대로 납득하지 않아 주위 사람을 곤란하게 했다. 의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왕은 의문이 생길 때마다 실험으로 진실을 밝히려고 했다. 어느 날, 왕은 식사 후에 쉬는 것과 운동을 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소화가 빠른지가 궁금했다. 감옥에서 불러낸 죄수 2명에게 한 명은 한 상 가득 차린 음식을 먹이고 잠을 자게 하고, 다른 한 명은 뛰어다니며 사냥을 하도록 시켰다. 몇 시간 후 두 사람을 다시 궁전으로 불러 배를 갈라 내용물을 직접 살폈다. 그 결과 잠을 잔 사람이 음식을 더 빨리 소화시킨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한 번은 어느 나라 말이 인간의 원초적인 언어인지 논쟁이 벌어졌다. 왕과 신하들은 격론 끝에 히브리 어, 그리스 어, 라틴 어를 후보에 올리고 내기를 했다. 왕은 단순하면서 기묘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여러 명의 갓난아기를 모아 각각 독방에서 키운다. 아이들에게는 최고급 식사와 옷이 지급되었다. 단, 아기를 돌보는 사람은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아야 했고 같이 자거나 놀거나 안아주어서도 안 되었다. 다수의 아기가 커서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언어가 바로 인간의 원초적인 언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기에서 누구도 이기지 못했다. 살아남은 아기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800년 전의 이 무시무시한 실험은 현대 정신 의학자가 '모성 박탈 증후군'이라는 병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하는 기록이라고 한다.

# 2
히포크라테스가 활약하던 시기에 인도 의학은 그리스보다 앞서 있었다. 고대 마우리아 왕조의 법전에는 다음과 같은 의료 윤리 강령이 있다.
"의사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말고 온 힘을 다해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 복장은 검소하고 태도는 겸손해야 하며, 나쁜 친구를 사귀어서는 아니 된다. 또 환자에 관해 아는 사실을 누설해서는 아니 된다. 죽어 가는 환자에게 죽음을 통보해서는 아니 된다.... 언제나 의술을 연마하고 진찰을 할 때에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자신의 돈벌이보다 환자의 경제 사정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 3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구휼하는 시설, 즉 병원이 최초로 생긴 곳은 불교의 영향을 많은 받은 기원전 600년 경의 인도였다. 서양에서도 종교적 자선을 목적으로 중세 기독교의 보급과 더불어 각지에 생겨났다. 병원(hospital)이 라틴 어의 '손님(hospes)'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확히는 교회 부속 숙박 시설이 그 기원이다. 병원에 의사가 근무한 것은 훨씬 뒤의 일로 유럽 대륙은 14세기부터, 영국은 18세기가 되어서다. 그러나 시설이 열악하여 병원에서의 감염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이 생겼다.

# 4
마취법도 없고 항생 물질도 없던 18세기에는 수술을 하면 사고가 나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도망가 자살하는 환자도 많았다. 프랑스 외과의 권위자였던 벨포(1795~1867)는 학생에게 "수술 시의 고통이나 위험성에 관해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의사의 의무"라고 가르쳤다.

# 5
사고를 많이 냈던 의사 중에 영국의 리스턴(1794~1847)이 있다. 그는 당대의 명의였으나 성격이 급했다. 회진 중에 조수가 환자의 혹에 대해 묻자, "잘라 보면 알겠지."라며 갑자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혹을 잘라 냈다. 그런데 그 혹은 종양이 아니라 혈관 벽이 팽창되어 종양처럼 보인 동맥류였다. 갑자기 동맥을 절단당한 환자는 그 자리에서 출혈 과다로 숨졌다. 빨리 다리를 절단하다가 고환까지 잘라낸 경우도 있었다. 당시는 고의로 환자에게 해를 끼친 경우가 아니라면 의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

# 6
높은 사람을 치료하다 실패하면 의사는 큰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중세에 어떤 의사는 교황을 치료하다 실패하자 독약을 처방했다는 누명을 쓰고 산 채로 온몸의 껍질이 벗겨졌다. 14세기 보헤미아의 왕이 시력을 잃었을 때 치료에 실패한 의사들은 곧바로 마대 자루에 담겨져 강에 던져졌다. 조선 시대에도 임금이 승하하면 그동안 치료를 담당했던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쳐서 어의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귀양을 갔다.

# 7
제왕 절개술은 역사가 꽤 오랜된 듯하다. 주로 산모가 사망한 후 태아를 살리기 위해 시행되었다. 산모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제왕 절개술은 16세기에 나타난다. 그런데 제왕 절개는 산모 스스로 시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에서는 1822년에 최초의 기록이 보인다. 산모는 쌍둥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배를 연 다음 첫아기를 꺼내고 나서 기절했다고 한다. 뒤늦게 의사가 발견해서 두 번째 아이를 꺼내고 상처를 봉합했는데 산모는 살아났으나 아이들은 구하지 못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자기를 수술한 여성들이 의사가 수술한 산모보다 생존율이 높았다고 한다. 통계를 보면 의사가 수술한 제왕 절개의 산모 생존율이 10%였던 데 비해 여성들이 스스로 시행한 제왕 절개는 생존율이 50%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만큼 병원에서는 치명적인 세균 감염 확률이 높았다.

# 8
수술의 대부분은 사지절단술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는 수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 술이나 아편이 쓰였다. 의사들은 환자를 움직일 수 없게 꽁꽁 묶은 다음 조수로 하여금 사지를 누르도록 하고 귀마개를 한 채 가능한 한 빠르고 정확하게 수술을 끝내려고 애썼다. 냉정을 잃지 않는 침착성이 외과 의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19세기 초 외과 의사는 연예인과 비슷한 존재였다. 수술이 있는 날은 학생을 포함한 많은 관중이 계단식 원형 강의실에 몰려들었다. 외과 의사가 조수들을 앞세우고 입장할 때면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수술이 무서워 환자가 도망가면 조수가 쫓아가 잡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의사의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은 오늘날 암에 걸렸다는 말보다 더 무서웠다.

이 책으로 만나는 의학사는 피와 약 냄새로 얼룩져 있다. 인류가 현재의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보여준다. 먼 미래를 상상해 본다면 지금 역시 원시적인 의료 단계인지 모른다. 21세기 또한 인체와 생명을 다루는데 있어서 야만의 시대였다고 기록할 게 분명하다. 인류가 나아갈 길은 까마득하게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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