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제법 안온한 날들

샌. 2021. 7. 11. 11:00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

 

이 책에서 건진 한 문장이다.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한 글쓴이는 수많은 죽음과 불행을 지켜보며 인간은 조건이 아무리 척박하더라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러이러하니까 타인이 불행하다고 재단하는 것은 나의 오만일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을 안고 당당하게, 당연하게 살아간다. 정도의 차이일 뿐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제법 안온한 날들>은 이대목동병원 임상조교수로 재직중인 남궁인 님이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했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을 감성적인 필체로 보여주는 책이다. 가슴 뭉클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사연들이 많다. 저자는 살벌한 응급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을 정도로 여리고 따스한 분인 것 같다. 인간의 고통을 곁에서 접하며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떤 통찰을 얻었을까. 죽음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의외로 담담하다.

 

"죽음은 내가 있는 공간에서 순리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이 당신이 더 희망차게 혹은 더 절망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거나, 거꾸로 삶의 의미를 비추는 무언가가 되지는 못한다. 죽음이 자신에게 오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먼저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은 낭비다. 나는 실존을 다루는 과학자로서, 또 그 일을 업으로 행하는 사람으로서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삶의 의미는 나도 아직 모른다. 하지만 죽음은 있다."

 

'제법 안온한 날들'이라는 책 제목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내 나름대로의 '제법 안온한 날들'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험한 파도를 헤치며 배를 모는 게 아닐까. 인생에서 '안온'이라는 말을 쓸 수는 없지만, 앞에 '제법'을 붙일 수는 있다. 어쩐지 그 사실이 고맙다.

 

'생활'이라는 글에서는 저자의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분임을 알 수 있다. 저자는 30대 후반의 독신이다.

 

1) 수면 시간은 충분하지만 과하지 않아야 한다.

2) 급한 일이 아니라면 전화를 걸지 않는다... 외로움이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결국 외로움도 힘이 된다... 스마프폰과 포털 사이트 기사는 필요악이다. 될 수 있는 대로 만지지 않는 편이 어느 모로 봐도 좋고, 스트레스도 덜하다.

3) 독서는 한 달에 스무 권 정도로 정한다.

4)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시 낭송회에 참석한다.

5) 주말 하루는 축구하러 나간다.

6) 평일 하루는 음악을 하러 나간다.

7) 주변에 음악을 틀어놓는다.

8) 습득한 외국어를 놀리지 않도록 틈날 때마다 읽고 쓰고 기억해본다.

9) 청소는 많은 시간이나 품을 들이지 않고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활동이다. 느리지만 꼼꼼하게 시간을 들여 청소한다. 누군가 갑자기 찾아와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다.

10) 혼자 있는 시간만이 나를 발전시킬 수 있다. 또,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11) 끼니를 직접 요리해 먹는다.

12) 써야 한다는 생각을 쉬지 않는다. 실제로 무슨 생각이든 적기 시작해 남겨놓는 것이 최고의 습관이다. 하지만 그 생각과 기록이 정말 좋은 것이 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야 한다.

13) 술자리를 줄일 필요가 있다. 정신이 혼탁한 채로 정신이 혼탁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자주 하면 좋을 리가 없다. 반드시 필요한 술자리란 없다고 생각한다... 내 입에서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말이 자꾸 새어나가는 일이 어쩌면 좋지 않다.

14) 남이 쓴 것뿐 아니라 자신이 쓴 글도 읽는다.

15) 드라마는 지나치게 통속적이고, 예능은 지나치게 들떠 있으며, 뉴스는 몰라도 되거나 이미 아는 것들을 늘어놓으며 종종 현실을 호도한다. 영상이 그리우면 영화를 본다.

16) 옥상에 있는 두 뙈기 밭에는 작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심어 침착하게 가꾼다. 낯선 분야지만 경작에 관련된 노하우를 찾아보아 직접 작물에 약간의 정성을 더 들이는 것만으로, 그들은 끔찍하게 잘 자란다.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어 키워보는 체험은 신비로움을 선사하며, 손수 경작한 작물로 요리하거나 김장을 담글 줄 안다는 것은 대단한 자산이다. 무엇보다 땅에서 뭔가를 얻어오고 있다는 생각으로 살 수 있다. 그 느낌이 얼마나 충만한지 모른다.

17) 가끔 휴가를 길게 받아 멀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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