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어느 하루

샌. 2024. 5. 14. 11:24

치과 진료를 위해 아침 9시에 집을 나섰다. 2024년 5월 13일, 비발디의 '사계'가 울려퍼지는 듯한 화창한 봄날이었다.

 

병원에 예약한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하여 가까이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렀다. 요사이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보기 때문에 서점을 찾는 일이 거의 없다. 중고서적에서 풍기는 냄새가 고향을 찾은 것처럼 아늑했다.

 

 

입구에 있는 '당신은 책 중독자인가?'라는 게시문을 보면서 과거의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책 중독'이란 책 수집벽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 같다. 마음에 드는 책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못 배기는 때가 나에게도 있었지.

 

 

올초에 앞니 하나가 부러졌다. 단골 치과에서는 임플란트 대신 브릿지를 권했다. 그래서 옆 이빨 3대를 신경치료 한 뒤 함께 브릿지 시술을 받았다. 이날은 석 달간의 치료가 끝나는 날이었다. 총 3백만 원이 들었다. 이 돈을 벌충하자면 올해 있는 동기들 해외여행은 마다해야 할 것 같다.

 

 

오후에는 K와 양재에서 바둑 약속이 있었다. 시간 여유가 있어 탄천과 운중천을 따라 판교역까지 걸어갔다. 느릿느릿 굼벵이 행보여서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반팔 차림의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천변을 따라 벚나무와 소나무가 도열한 아기자기한 산책로도 있다. 

 

 

판교는 지하로만 다녔는데 지상에 올라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름대로 테크노 관련 기업 빌딩이 많았고, 점심 시간이 되니 젊은 직장인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점심은 굶을 요량이었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추어탕 집을 지나칠 수 없었다. 

 

K와 기원에서 만나 바둑 네 판을 두었다. 늙으니까 바둑판 앞에서 제일 자주 하는 말이 "또 깜빡했네!"가 되었다. 둘의 바둑에서는 결정적인 '깜빡'을 적게 하는 사람이 이기게 된다.

 

이 기원에 들어설 때면 출입구에 있는 '정각(正覺)'이라는 붓글씨에 늘 눈길이 머문다. 기원 주인장도 흰수염 날리는 도사 같은 풍모를 하고 있다.

 

 

바둑 결과는 2승2패로 잘 어울렸다. 저녁은 아래 식당에서 같이 황태구이 정식으로 하면서 금주를 다시 하게 된 사연을 설명했다.

 

K와 만나면 바둑과 당구가 세트로 따라붙는다. 어릴 때 하던 돌 놀이와 공 놀이의 연장선이다. 두 주만에 큐대를 잡아선지 감각을 찾지 못해 애먹었다. 계산을 하고 나서 당구장 사장님과 재회한 기념으로 사진을 찍자고 했다. 당구장을 청결하게 관리하는 측면에서는 업계 최고인 사장님이다.

 

 

술 안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이 깔끔했다. 술은 마실 때만 기분 좋을 뿐 여러 가지 부작용을 피할 수 없다. 특히 나이가 드니 감당하지 못할 사태가 생겨서 난감해질 때가 많다. 단칼에 자르는 게 나로서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더라도 백해무익(百害無益)까지는 아니고 백해십익(百害十益) 정도로는 봐 줄만한 술이다. 

 

하늘에는 음력 초엿새 달이 선연했고, 집집마다 각자의 사연을 담고 있을 불빛이 환했다. 아침 9시에 나가서 밤 10시가 되어 돌아왔다. 내 생활에서는 드문 '어느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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