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뒷산에서

샌. 2016. 2. 21. 15:27

 

뒷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서 B 아파트로 내려가는 길을 묻는 것이었다. 우선 산에서 아이들을 만난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부모를 따라온 아이는 있어도 자기들끼리 산에 놀러 오는 경우는 그동안 한 번도 못 봤다. 요사이 아이들은 학원 다니랴 과외 하랴 어른보다 더 바쁘다. 설령 시간이 난다 해도 산으로 놀러 보낼 부모는 없다. 세상이 그만큼 험해졌다는 뜻이다.

 

우리가 클 때는 마을 뒷산은 놀이터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보는 던져놓고 어지간히 쏘다녔다.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들어갈 수가 없지만 그때는 어디라도 뛰어다닐 수 있었다. 산에서는 주로 전쟁놀이를 했다. 오늘 산에서 만난 두 아이도 각각 시커면 장난감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사내아이들이 그 나이 또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다만 요사이 아이들은 마음대로 뛰놀 수가 없다는 점이 다르다. 야성의 본능을 펴보지 못한다.

 

마침 방향이 같아 두 아이는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지름길을 알려줘도 불안한지 아저씨를 따라가겠단다. 자연과 가까이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산은 두려울 것이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안스러웠다. 이런 모습으로는 호연지기가 길러질 리 없다. 산 밑에 초등학교가 있지만 아이들이 산에서 야외 교육을 하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지식 습득을 멈추고 교실을 벗어나 자연을 선생으로 삼으면 좋으련만.

 

아이들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작은 종이쪽지를 주워왔다. 북에서 날려보낸 삐라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마귀할멈 같이 그려져 있었고, 열병식 때 등장한 미사일 사진도 있었다. 반응을 보여주니 아이들은 신이 나서 계속 주워와 '여기도 있어요." 하며 보여주었다. 삐라를 줍느라 그제야 아이들은 산을 이리저리 누비고 다녔다. 삐라는 엉뚱한 데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세상은 언제까지 기다려야 찾아올까? 어른들은 아이들의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을 얹어 놓고 있다. 곧게 서야 할 척추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세상에 맞추어 키운다는 건 식물의 분재와 비슷하다. 생명의 본성을 왜곡하는 것이다. 산비탈을 활발하게 오르내리는 아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그대로 두면 스스로 제 놀이를 찾아 놀 줄 안다. 요사이는 놀이마저 프로그램화되어 학원에서 배운다. 이래서는 학습에 대한 자발성과 창의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래저래 한숨이 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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