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기본수법사전

샌. 2016. 10. 19. 09:20

최근에 본 바둑책이다. 일본의 후지사와 슈코 기성이 썼는데 두 권으로 되어 있고 총 1천 페이지에 달한다. 다 보는데 거의 1년이 걸렸다.

 

상권은 공격과 수비의 급소를 다루고 있고, 하권은 포석, 공격, 사활, 종반의 수법을 담고 있다. 원저의 내용이 상당히 좋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바둑 모양에서 급소가 어디인지 아는 능력을 키우는 데 알맞은 책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급소를 무시한다면 '바둑의 진(眞)에서 눈을 돌리고, 바둑의 선(善)에 등을 대고, 바둑의 미(美)를 더럽히는 것이 된다'고까지 말한다.

 

<기본수법사전>(오성출판사)의 단점은 번역이 엉망인 점이다. 바둑의 기초 용어도 모르는 사람이 번역한 것 같다. 아니면 자동번역기를 돌리고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출판한 것 같다. 우리나라 바둑계 현실이 이렇다.

 

계마, 내격, 부풀기, 줄짓기, 들여대기, 굽기, 불평하기 - 책에 나오는 생뚱맞은 용어들이다. 문장도 어법에 맞지 않는 게 태반이다. 너무 많아 예시를 들고 싶지도 않다. 차라리 글을 보지 않고 바둑판 그림만 보는 게 낫다. 바둑 두는 사람에게 조금만 검토를 시켰어도 이런 엉터리 책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원문만 있다면 내가 말끔하게 번역해서 출판사에 보내고 싶다.

 

그나마 바둑책이니까 참고 끝까지 볼 수 있었다. 원 내용은 그만큼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 덕분에 수를 보는 눈이 정교해졌다. 내가 제일 약한 부분이 전투인데, 약간이나마 힘이 붙었음을 실전에서 확인한다. 다시 재독하려고 한다.

 

참고로 이 책을 쓴 후시사와 슈코는 괴물 기사로 불렸다.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에 자유분방한 사고, 넘치는 끼와 사랑을 타고 난 분이었다. 엄청난 술고래에 후배를 사랑하는 만큼 여자를 사랑했고, 바둑을 사랑하는 만큼 노름도 사랑했다. 한 번도 스승의 권위의식을 내세우지 않았고, 보통의 일본인과 달리 파격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후지사와가 가장 사랑한 제자가 조훈현이었다. 조훈현의 <고수의 생각법>에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온다. 1977년 가을, 선생님한테서 김포공항에 왔으니 맞이하라는 연락이 왔다. 새벽까지 술을 먹다가 문득 조훈현이 보고 싶어 무작정 첫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온 것이다. 둘은 곧바로 청계천의 서린호텔로 가서 3일 밤낮을 바둑만 두었다고 한다. 후지사와는 3일 내내 술을 마셔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었던 건 물론이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네 바둑이 썩었으면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안 썩었으니 안심하고 돌아간다."

 

세계가 인정한 천재 조훈현은 지금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가끔 TV 화면에 비친다. 후지사와 선생이 하늘에서 이렇게 호통치시지 않을까 싶다. "이놈아, 너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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