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만약에

샌. 2011. 4. 1. 07:35

나는 소리에 너무 민감하다. 소음을 참지 못한다. 신경을 거슬리는 작은 소음일수록 더하다. 다른 것은 대체로 무난한 편인데 유독 소리에만 노이로제가 심하다. 그렇다고 음감이 좋은 것도 아니다. 아예 제로다. 그러면서 주변 소리에는 예민한 게 내가 보아도 과민반응이 지나치다. 이것만 보면 사람들은 날 아주 까칠한 사람으로 안다.

옆 사람의 타닥거리는 컴퓨터 자판 소리, 전화 소리, 잡담들, 사무실에서는 이런 것들 때문에 정신집중이 안 되었다. 사무실에게 받았던 대부분의 스트레스가 나에게는 소리였다. 한번은 옆 동료에게 자판 좀 곱게 두들기라고 말했다가 눈물을 흘리게까지 만들었다. 뭐 저렇게 예민한 사람이 있느냐고 속으로 욕을 많이 했을 것이다. 내가 큰 사무실을 피하고 홀로 사무실 생활을 즐긴 건 이런 이유가 컸다. 영화를 보는데 옆에서 팝콘이라도 먹고 있으면 그날 영화는 종쳤다. 도대체 신경이 쓰여 화면에 몰두하지 못한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격이 이러니 가족들이 고생일 수밖에 없다. TV 볼륨은 모기소리만큼 줄여야 하고 통화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시끌벅적해야 사람 사는 맛이 난다고 하지만 난 정반대다. 그리 되면 차라리 집에서 도망간다. 이사를 다니며 집을 구할 때도 첫째 조건이 조용한 환경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맨 꼭대기 층인데 위층 소음에서 자유롭다는 게 제일 좋다. 그리고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교통이 불편하다고 기피하는 아파트지만 나에게는 최적의 장소다.

곧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제일 걱정이 되는 게 위층에 어떤 사람이 사는가이다. 만약에 개구쟁이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어쩌지, 근심이 많다. 며칠 전에는 남자 초등학생들이 우당탕거리며 위층에서 내리는 걸 보고는 더 걱정이 커졌다. 집안에서 뛰어다니는 쿵쿵거리는 소리를 견뎌낼 자신이 없다.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해도 요사이 부모들은 자식 중심이지 이웃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철부지 때는 주의를 줘도 그때만이다. 제발 조용한 가족이 들어오기를 빌 뿐이다. 아파트가 편리하긴 하지만 생활소음 문제로 이웃간에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자주 있다. 공동생활을 하면서 기본예의를 지킨다면 서로가 스트레스 받는 일은 훨씬 줄어들 텐데 말이다.

내가 지금 필요 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조바심을 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인생사 대부분의 걱정이 그런 식이다. 만약에 이러이러하게 되면 어쩌지, 하고 문제를 만들어 고민한다. 그러나 알면서도 안 되는 게 사람 마음이다. 사람 마음이란 게 어떤 때는 무척 지질하다.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걸 알면서도 고민 속으로 빠져든다. 제 스스로 만들어 속을 끓인다. 그런 ‘만약에’ 병만 고쳐도 인생살이가 조금은 더 편안해질 텐데, 그러나 마음대로 안 되는 걸 어떡하랴.

서울을 벗어나며 제일 큰 희망이 조용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서까지 소음으로 스트레스 받고 싶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파트 체질이 아니다. 장기적으로는 어디 산속 외딴 집을 구할 계획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어쩔 수 없다. 적응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 수밖에. 바라건대 새 동네에서는 좋은 이웃이 되고 싶다. 마음이 통하는 이웃을 만나고 싶다. 서로 음식을 나눠먹고 왕래하며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면 아쉬웠던 다른 모든 걸 보충하고도 남을 것이다. ‘만약에’의 우려와 ‘함께’의 기대가 공존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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