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유방

샌. 2016. 12. 16. 11:56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군웅들이 할거하며 다투다가 한나라 고조가 등장하는 과정은 거대한 토너먼트 시합 같다. 마지막 결승에는 유방과 항우가 겨룬다. 약 2,200년 전 이 시기가 중국 역사에서 제일 드라마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영웅열전 중 한 권인 <유방>을 읽어보게 되었다. 초와 한의 쟁패에 대해서는 유방, 항우, 한신 등에 관한 단편적인 일화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전체적인 윤곽이 잡힌다. 각 인물의 특성도 어느 정도는 드러난다.

 

주인공은 유방이지만 사실 항우에 더 호감이 간다. 유방이 술수에 능하고 고단수라면, 항우는 우직 단순하다. 무식하면서 고집이 센 것이 병통이었다. 그것 때문에 늘 전투에 이기면서도 결국 유방에 패배했다. 지략 싸움에서 진 것이다. 유방에게는 장량, 소하 같은 똑똑한 전략가가 있었다. 항우는 범증의 책략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승부에는 졌지만 항우한테서는 훨씬 더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물론 결정적인 결점이 있었다.

 

난세에는 힘센 놈이 천하를 차지한다. 그러나 힘만으로는 안 되고 속임수와 꼼수도 필요하다. 그 점에서 유방이 우위에 있었다. 천하명장 한신이 결국 토사구팽을 당한 것도 싸움밖에 모른 단순함에 있었다. 한신은 정치판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건 황제에게는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유방과 한신은 애초부터 어울릴 수 없는 파트너였는지 모른다.

 

유방의 일화 중에 인상적인 것이 두 가지 있다. 둘 다 가족과 관계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유방이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대패를 당했다. 팽성에 주둔하던 유방의 56만 대군이 방심하다가 항우의 3만 군사에게 졌다. 얼마나 급했던지 유방은 아내는 버려두고 아들, 딸만 데리고 도망을 쳤다. 뒤에서는 초나라 군사가 바로 뒤까지 추격해 왔다. 이때 유방은 수레의 무게를 덜기 위해 아들딸을 발로 차서 수레 밖으로 밀어버렸다. 부하가 받아서 수레에 올렸지만 유방은 재차 자식을 차 냈다. 이번에는 역시 부하가 준비하고 있다가 받아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식을 버린 것이다.

 

두번째는, 항우와 광무산에서 대결할 때 유방의 아버지는 항우 진영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항우는 협박했다. "유방, 이놈! 얼른 투항하지 않으면 네 아버지를 가마에 삶아 국을 만들 것이다." 이때 유방의 반응은 정말 의외였다. "그래 좋다. 네 마음대로 하고 그 고깃국이나 한 그릇 보내다오." 결국 항우는 유방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 자식까지 버릴 수 있는 잔인함, 이것이 유방이 천하를 제패하게 된 힘이었는지 모른다. 겉으로 보면 항우가 무자비했던 것 같지만, 실은 유방의 성격이 더 냉혹했다. 이것이 권력을 잡으려는 자가 갖춰야 할 속성인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곧 대선 국면에 접어든다. 많은 후보가 좋은 이미지로 포장될 것이다. 대중은 숨은 이면을 볼 수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 쟁취의 무대는 너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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