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자괴감

샌. 2016. 12. 30. 16:25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다. 순자(荀子) 왕제(王制)편에 나오는 원문은 이렇다고 한다.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임금은 배, 백성은 물이니, 물은 배를 뜨게 하지만,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성난 민심이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냈으니 '군주민수(君舟民水)'는 현 시국을 적절히 반영한 말이다. 헌법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라의 주인이 임금이었던 시절에도 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했는데 현대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되돌아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로는 '자괴감'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과 담화를 발표하며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라는 발언이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패러디가 넘쳐났다.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자괴감'을 사용하며 희화화 했다.

 

'자괴감(自愧感)'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대통령의 말에서는 부끄러움보다는 원망이나 억울한 감정이 더 들어있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대통령의 진정성이 의심을 받았다. 전체 담화문을 보면 누구나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연말이 되니 나 자신 자괴감이 많이 든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자책이 크다. 남편으로, 부모로, 자식으로, 제 노릇을 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실히 느낀다. 이순(耳順)이 되어도 날카로운 성격은 변하지 않고 남의 가슴에 피멍을 남긴다.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지 헷갈리는 건 여전하다. 누구는 나이가 들면 잘 익어가는 된장처럼 완숙해진다는 데 나는 영 아니올씨다이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거창한 담론은 행복과 별 관계가 없다. 소소한 일상이 그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수신(修身)이 되지 않는다면 밖에서 어떤 칭찬을 듣더라도 공염불이다. 껍데기 인생은 행복을 가져오지 못한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2016년 세밑에 절절하게 느끼는 자탄이다. 새해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껏 그래 왔듯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을 안다. 인간은 거의 변하지 못한다. 그것이 인생의 쓸쓸함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자괴감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더라도 제 쓰러진 자리를 확인할 수 있는 건 자괴감 덕분이다.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거기에서 새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절망 속에 희망이 들어있음을 억지로라도 믿어야 한다. 개인으로나 나라로나 유난히 자괴감이 많이 든 2016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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