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님의 침묵 / 한용운

샌. 2023. 12. 12. 11:23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야 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 님의 침묵沈默 / 한용운

 

 

1926년 회동서관에서 나온 초판본을 복원한 <님의 침묵>을 사서 틈틈이 보고 있다. 이 시집에는 만해가 설악산 백담사에 있을 때 지은 88편의 시가 실려 있다. 100년 정도 전의 옛 문체 그대로 읽으니 시의 맛이 새롭다.

 

시집의 처음에는 '군말'이라고 붙인 시인의 말이 실려 있다. '군말'이란 '군더더기 말'이라는 뜻인 듯하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자유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自由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받지 않더냐 너에게도 님이 있너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희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어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한용운의 시를 처음 접했다. 교과서에는 '님의 침묵'과 '알 수 없어요'가 실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해의 '님'은 시를 쓰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국권을 잃은 '조국'으로 볼 수 있다고 선생님이 설명했던 것 같다. 한참 지나서 만해의 시를 다시 읽으며 과연 그런 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복원본에 적힌 '군말'이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여기 나오는 '기루다'와 제일 가까운 말은 '그리워하다'일 것이다. 어감상으로는 '기루다' '기룹다'가 더 간절한 마음이 담긴 것 같다. 그러므로 시를 읽는 사람에게 '기룬' 것이 곧 님이 아니겠는가. 만해에게 '님'은 조국일 수도, 부처일 수도, 애인일 수도 있었으리라. 아니 그 모두를 초월한 어떤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만해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어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고 했다. 만해는 묻는다. "너에게도 님이 있너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희 그림자니라." 깨어져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님을 버려야 '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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