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화려한 공상

샌. 2012. 2. 26. 10:55

잠자리에 들어서 억지로 공상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웃 덕택이다. 한밤중의 소음을 견디기 위해서는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는 수밖에 없다. 책을 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공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게 더 낫다.

공상은 화려하고 자극적일수록 좋다. 요사이는 호화유람선으로 세계 일주를 하는 상상을 한다. 어떤 행운이 찾아와 가장 크고 화려한 선실이 공으로 주어졌다. 야외 수영장까지 딸려 있다. 거실에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세계의 일품요리가 끼니마다 제공된다. 예쁜 아가씨의 룸서비스를 받으며 어느 왕에 부럽지 않은 여행을 한다. 유람선이 항구에 정박하면 특별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모습을 그린다.

이런 상상은 마취제로 작용해 위층 소음을 잠시 잊는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다. 시간이길어지면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자신이 초라하고 불쌍해 보인다. 그다음부터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올라가서 확 엎어버리고 싶다. 위층에서는 이런 아래층 심정을 모를 것이다. 얘기를 해도, 조심하겠습니다, 라고는 하는데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내 자식, 손자가 귀여운 만큼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도 필요하다.

밤이 무섭다. 전에는 밤 10시면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젠 12시가 넘어야 한다. 덕분에 생활 습관도 바뀌고 있다. 늦게 자다 보니 간식이 필요하고, TV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고, TV 음량도 크게 틀어놓는다. 적응하며 살려니 어쩔 수 없다. 아내는 남편이 너무 유해서 이렇다며 핀잔을 준다. 내 무능력을 이렇게 실감한 적도 없다.

어제 아내는 부동산 사무실에 다녀왔다. 노이로제에 걸리느니 차라리 집을 옮기는 게 나을지 모른다. 살다 보니 이런 엉뚱한 데서 마찰이 생긴다. 좀 편해지나 싶었는데 인생이란 게 근심 걱정이 떨어지지 않는다. 화려한 호화유람선 여행도 오래 써먹었으니 더 자극적인 공상거리를 찾아야 한다. 마취제도 점점 내성이 강해진다. 젊다면 컴퓨터 게임에라도 빠져볼 텐데, 이래저래 살 맛을 잃은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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