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위대한 패배자

샌. 2011. 11. 29. 18:50

롬멜, 체 게바라, 고르바초프, 라이너 바르첼, 앨 고어, 메리 스튜어트, 루이 16세, 빌헬름 2세, 요한 슈트라우스, 하인리히 만, 렌츠, 라살, 트로츠키, 오스카 와일드, 크누트 함순, 리제 마이트너, 앨런 튜링, 게오르크 뷔히너, 이사크 바벨, 빈센트 반 고흐,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볼프 슈나이더가 쓴 <위대한 패배자>에 소개된 사람들이다. 세상에 이름을 남겼으니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마지막에는 승리를 사기당하거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몰리고, 왕좌에서 쫓겨나고, 명성을 도둑질당한 사람들이다. 또, 고흐처럼 살아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역사는 승리자만 기억한다. 세상은 승리자의 논리로 돌아가고 승리자들이 역사를 쓴다. 한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가 번진 적도 있었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세 얼간이'에서도 바이러스가 학생들에게달에 착륙한 사람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달에 맨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이 누구인지는 다 아는데 두 번째로 내린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게 세상의 원리다. 저자는 승자와 패자의 인간성을 연구하고 책으로 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승자는 패자보다 좀 더 야비하고 비정할 뿐이다. 백과사전에 이름이 실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거칠고 비정하고 역겨운 사람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집요하고 끈질긴 사람일수록 정상에 도달할 확률이 높다.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능력이 아니라 운과 인간성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그런 견해에 공감하게 된다. 물론 패배자 중에도 고약한 사람이 있고, 승리자 중에도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비열한 승리자들이 많다. 전화를 발명한 세 사람 가운데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쥔 사람은 그중에서도 가장 비양심적인 벨(A. G. Bell)이었다. 벨은 메우치((A. Meucci)의 실험실에서 함께 일하면서 전화기를 처음 보았고, 메우치는 이미 1871년에 특허를 따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기한이 지나 특허가 소멸한 틈에 벨은 새로 특허를 따냈다. 메우치는 사기 혐의로 벨을 고소했으나 1896년에 숨을 거둘 때까지 판결이 나지 않았다. 또, 벨의 특허가 그레이(E. Gray)의 기술을 사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벨 전화기는 그의 고유한 기술이 아니라 절반은 그레이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레이도 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으나 최종 판결에서는 찬반 동수로 운 좋게도 벨이 이겼다. 이렇게 해서 두 번의 부정을 저지르고도 벨은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었다. 그레이와 메우치는 이름조차 잊혔다.

승리자가 이웃에 산다면 가장 나쁜 이웃이 될 거라고 한다. 승리자로 가득 찬 세상보다 나쁜 것은 없다. 오로지 정상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승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마다치 않는 사람들, 인간적인 매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들만 살아가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싫다. 그나마 삶을 참을 만하게 만드는 것은 패배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패배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분수를 알고 제자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있기에 살아갈 만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도덕경은 말한다. '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기지만, 진짜로 힘이 센 사람은 자기를 이긴다[勝人者有力 自勝者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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