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동창회 유감

샌. 2006. 9. 1. 09:08

얼마 전에 초등학교 총동창회가 모교서 열렸다. 기별로 조촐하게 모이던 동창회가 몇 전부터 매년 전체 졸업생이 한꺼번에 모이는 큰 행사로 변했다. 여름이나 가을이면 1박2일의 총동창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학교마다 걸리는 것을 보면 이것은 전국적인 현상이지 싶다.


이번에 거의 십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 보았다. 옛 친구들을 만나니 반갑고 고마웠다. 그러나 너무 오랜만에 만나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색함도 있었다. 특히 여자 동창들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한 학년 학생이 백여 명 정도 되는 작은 시골 학교였는데도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졸업한지 40 년이 되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동창회 모임은 이틀에 걸쳐 했는데 첫째 날은 전야제였고 둘째 날은 운동회로 진행되었다. 전야제는 기별 노래자랑 대회였다. 그런데 그 규모가 예상보다 컸다. 운동장에 설치된 무대는 방송무대를 뺨쳤고, 유명가수를 초대하는 것은 물론 사회자도 멀리 부산에서 모셔왔다. 피날레의 불꽃놀이도 화려했다. 그러니 볼거리가 충분했고 참석한 사람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대체로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겉의 화려함에 비해 내실이 없었다는 점, 예산이 2천만 원 가까이 소요된 대형 물량주의 행사였다는 점이 나에게는 아쉽게 생각되었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가수였는데 그 가수 한 사람을 초대하는데 4백만 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너 시간 이상 고음의 스피커 소리에 시달린 것도 고역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나면 각 기별로 흩어져 회포를 푸는데 대개가 음주가무, 화투로 이어진다. 늙은 사람, 젊은 사람 구별이 없다. 오랜만에 참석해서 느낀 점은 좀 차분한 동창회가 될 수는 없을까하는 점이다. 잔칫집 같은 시끌법석도 좋지만 옛 추억에 젖을 수 있게 하는 진지함도 필요할 것 같다. 몇 시간동안 이어지는 귀를 찢는 소음 대신에 잔잔한 음악을 틀어주면서 동기들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 수는 없을까? 옛 영상물을 보여줘도 좋을 것이고, 기별로 돌아가며 그때의 선생님을 초대해 같이 만나는 모습도 좋을 것 같고, 또는 특별한 화제를 만든 동문이 나와 얘기도 들려주고 경험도 공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좋을 것 같다.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문화가 이미 시골이고 어떤 모임이고 두루 퍼져 있다. 풍류를 좋아하는 한민족에게 춤과 노래가 빠질 수가 없지만 최근에는 규모가 커지고 고급화되면서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이런 식의 행사가 유행처럼 번져나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작은 규모의 오순도순하고 소박한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다. 좀 재미가 덜 하더라도 의미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룻밤 때려먹고 노는데 천여만 원을 쓰는 것은 낭비가 아닐까? 기념비를 세우고, 폭죽을 쏘는 돈으로 후배 어린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다.


고향 면에는 초등학교가 3 곳이 있었는데, 많을 때는 학생 수가 2천 명 가까이나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 곳이 없어지고 하나만 남아있는데 학생 수는 고작 120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이 농촌의 현실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농촌 어디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래도 암담하기만 하다. 과연 전통적인 농촌이라는 개념이 살아남을지도 의문이다. 번쩍이며 터지는 저 불꽃의 폭음은 사라지는 우리들의 과거에 대한 슬픈 조종처럼 나에게는 들렸다. 그리고 먹고 마시며 떠들어대는 것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의 표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 시대의 종말에 대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것은 아니다 싶으면서도 이런 식으로나마 옛 시대에 대한 연대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동창모임을 보면서 우리의 놀이문화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뭔가 풍성하고 시끌벅적해야 한 바탕 잘 논 것 같고 주최하는 측에서도 생색을 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한 해가 다르게 행사 규모도 커지고 예산도 많이 소요되면서 나중에는 모이는 본질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게 된다. 작은 시골 학교에서 이런 규모의 총동창회는 5 년 정도의 주기로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좀더 건실하고 실속 있는 행사가 아쉽다.


실은 이번에 동기인 B와 H를 혹시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들은 나오지 않았다. 못 본 지가 B는 40년, H는 35년이 된다. 둘은 옛날 추억을 제일 많이 공유하는 있는 친구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길거리에서 마주치더라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을 것이다. 지금 내 기억에 남아있는 옛날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되었을 수도 있다. 풍문으로 들리던 그들의 소식도 이젠 끊어졌다. 우리가 언제쯤 다시 만나 옛 회포를 풀어볼 수 있을까? 이승에서의 우리들 인연의 끈이 다하지 않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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