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이모에게 가는 길 / 양애경

샌. 2012. 5. 28. 11:36

미금 농협 앞에서 버스를 내려

작은 육교를 건너면

직업병으로 시달리다가 공원도 공장주도 던져 버린 흉물 공장

창마다 검게 구멍이 뚫린 원진 레이온 건물이 나올 것이다

그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젊은 버스 기사와 야한 차림의 10대 아가씨의

푹 익은 대화를 들으며

종점까지 시골길 골목을 가야 한다

거기서 내려 세 집을 건너가면

옛날엔 대갓집이었다는 낡은 한옥이 나오고

문간에서 팔순이 된 이모가 반겨줄 것이다

전에는 청량리역까지 마중을 나왔고

몇 달 전에는 종점까지 마중을 나왔지만

이제 이모는 다리가 아파 문간까지밖에 못 나오실 것이다

아이고 내 새끼 라고 이모는 말하고 싶겠지만

이제 푹 삭은 나이가 된 조카가 싫어할까봐

아이고 교수님 바쁜데 왠일일까 라고 하실 것이다

사실 언제나 바쁠 것 하나 없는데다가 방학인데도

이모는 바쁘다는 자손들에게 미리 기가 죽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실 것이다

 

이모는 오후 세 시이지만 텅 빈 집에서 혼자 밥을 먹기 싫었기 때문에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무언가 먹이려 하실 것이다

하지만 눈 어둡고 귀 어둡고 가게도 멀은 지금동 마을에서

이모가 차린 밥상은 구미에 맞지 않을 것이다

씻을 그릇에 밥풀 알도 간혹 묻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 가지고 온 과자나 과일이나 약 따위를 늘어 놓으며

먹은지 얼마 안 되어 먹고 싶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모는 아직 하얗고 아담한 다리를 펴 보이며

다리가 이렇게 감각이 없어져서 걱정이라고 하실 것이다

그래서 텃밭에 갔다가 넘어져서 몇 달 고생도 했다고 하실 것이다

 

트럼펫처럼 잘 울리는 웃음 소리를 가진

아이 둘을 한꺼번에 끌어안고 젖을 먹일 만큼 좋은 젖가슴을 가졌던 이모

아이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게 하던 이모

이모의 젖을 먹지 않고 큰 아이는 이 집안에 없었다

이제 이모는 귀가 잘 안 들리기 때문에

젊은 아이들에게 지청구를 먹을까 봐 이야기를 걸어도 머뭇거리신다

그냥 아이구 그래 대견도 하지 라고 하실 뿐이다

 

지어온 한약을 내놓고 한 시간이 지나면

나는 여섯시 이십분 기차니까 지금 가야 해요 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이모는 아이구 그래 차 시간 넉넉히 가야지 라고 하실 것이다

텃밭에 심었던 정구지를 한 묶음 하고

내가 사 간 복숭아를 몇 알 도로 싸주실 것이다

그러고도 뭘 또 줄 게 없을까 해서

명절 날 들어온 미원이니 참치 통조림이니 비누 따위를 주섬주섬 찾으실 것이다

꼬꼬엄마 그럼 잘 있어요 라고 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이모의 뺨에 내 뺨을 부빌 것이다

그러면 이모는 감동해서 역시 내 새끼였지 라고 좋아하실 것이다

마당에 이만큼 나선 나에게

마을 버스 시간에 맞추어야지 서둘러라 라고 하면서도

어디 한 번 더 안아보자 하실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처럼 두 팔로 푸짐한 이모의 가슴을 껴안고

이모의 뺨에 내 뺨을 꼬옥 대 볼 것이다

이모는 속으로 이 새끼를 이제 못 볼 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속 없이 마을버스를 놓칠까 봐 뛰어 나오고

세 집을 건너 뛰어가면

마을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설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가며 나는 자꾸만 눈 언저리를 닦을 것이다

노인네 혼자 빈 집에 남겨져

젊은 애들한테 방해나 되게 너무 오래 사는 것 아닌가 하면서

잘 펴지지 않는 다리를 조심스레 움직여 보면서

혼자 오래 걸려 방으로 돌아가실 것을 생각하면서

우는 나를 마을버스 기사가 의아하게 거울 속으로 바라볼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서 번잡한 길에서 느꼈던 짜증이 부끄럽고

사람이 늙는다는 게 슬프고 무서워서

다시는 살아 있는 이모를 만나지 못할까 무서워서

나는 더 운다 원진 레이온 앞에 올 때까지 십 분이 못 되는 시간을

 

그리고 눈물에 깨끗이 씻겨서

이모가 길러 주었던

일곱 살짜리 갈래머리 계집애가 되어

청량리 역 가는 버스를 탈 것이다

세상에 꿈도 많고 고집도 세었던

제일 귀염 받던 곱슬머리 계집애가 되어서

 

     - 이모에게 가는 길 / 양애경

 

세상의 인연이 애틋하고 눈물겨운 건 시들고 사라지게 되는 존재의 운명 때문인지 모른다. 종교가 복된 내세를 약속하고, 철학이 본질불변설을 설파한다 해도 가까운 사람의 노쇠와 이별은 슬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존재의 공통적 속성상 타자에 대한 연민은 나에 대한 연민과 분리될 수 없다. 장례식장에서의 서글픈 울음은 망자에 대한 애도이면서 나에 대한 눈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인이 말하는 '이모에게 가는 길'은 동시에 '나에게로 가는 길'이 아닐까? 이 시가 단순한 가족 간의 추억과 사랑을 넘어 존재의 보편적 연민으로 나에게는 읽힌다.

 

인간에게 연민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인간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이 연민 때문이 아닐까? 먹을거리를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면서도 인간은 눈물을 흘릴 줄 안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다. 냉철한 지혜와 이성을 갖춘 로봇은 상상이 되지만, 연민의 감정이 풍부한 로봇은 만들어지기 어려울 것 같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비와 연민의 온전한 발현에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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