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박새에게 세들다 / 복효근

샌. 2012. 9. 27. 09:20

감나무 뒤 가까운 담벼락 돌틈 사이

박새 부부 둥지를 틀었나 보다

3월도 중순 너머

그런가보다 하기로 했다

안방에 둥지를 트는 것도 아니어서

새소리 몇 가락으로 세를 받기로 하고

새끼 깔 그동안만 전세 내주지

담벼락 앞 감나무 사이 나무 하나 더 심으려

무심코 정말 무심코 오늘

구덩이 하나 파려는데

갑자기 박새 부부 내 앞을 달겨든다

네 집이기도 하지만 내 집이기도 하다

점유권을 주장한다

아차차 그동안 몇 조각 새소리 미리 받아 들었던 게 죄로구나

엉겹결에 구덩이를 포기하고

나무 심기를 포기하고

이 봄을 저 박새 부부에게 맡기기로 하는데

저 부부 정말 전세 등기라도 한 모양 당당해서

아무 말 못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집 나무란 나무 제 식탁으로

대숲 그늘은 제 주방으로

저 하늘 구름은 제 신혼이불로

내 안마당도 제 운동장으로

모두 모두 소문내고 등기해놓은 것은 아닐까

어라, 그래 그으래

이 어처구니없는 침탈로

내 것이라고 부를 게 아무 것도 없는 빼앗겨서 즐거운

금낭화 촉 돋는 한 때

 

- 박새에게 세들다 / 복효근

 

 

아는 분에게서 계간지 <시향>을 받았다. 책에는 '현대시 펼쳐보기 50선'이라는 제목으로 50인의 시인들 작품이 등단순으로 나와 있다. 그중에서 하나, 이 시를 골랐다.

 

소유권 등기를 해 놓고는 자신의 소유라고 사람은 주장한다. 한 장의 종이쪽지를 얻기 위해서 사람은 얼마나 고군분투하는가. 시인은 박새 얘기를 하며 그런 착각을 여지없이 허문다. 내 것, 네 것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도리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박새가 제일 자유롭다. 우리도 박새처럼 사는 건 불가능할까? 내 것이라고 부를 게 아무 것도 없는, 오히려 빼앗겨서 즐거운....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포가(秋浦歌) / 이백(李白)  (0) 2012.10.10
울릉도 / 유치환  (0) 2012.10.03
이른 아침에 / 서정홍  (0) 2012.09.22
공갈빵 / 손현숙  (0) 2012.09.21
방심 / 손택수  (0) 2012.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