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스쳐가는 나그네

샌. 2013. 7. 26. 19:30

 

스무날 만에 햇볕이 났다. 작은 배낭을 꺼내 뒷산에 들었다. 장마가 시작되고는 출입을 하지 않았으니 한 달이 넘었다. 숲은 물기를 털어내느라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긴 장마에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벽에서는 물방울이 송송 배어 나올 듯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창문을 활짝 열고 뽀송뽀송한 공기를 맞았다. 그동안 화장실에서는 퀴퀴한 곰팡내가 계속 났다. 아내가 제습기를 사야겠다는 걸 겨우 말렸다. 뭐든지 기계에 의존하는 게 싫었다.

 

산길에서는 모기와 날벌레들이 뜸해졌다. 한두 마리가 달라붙었지만 초여름의 극성스러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산에서 메뚜기를 보았다. 농약 때문에 산으로 피신 온 것인가,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워낙 날쌔게 뛰어다녀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지만 틀림없는 메뚜기였다. 다만 덩치가 좀 작았다.

 

오늘도 산길에서는 두 사람만 만났다. 다른 때도 그랬다. 두 시간여 걷는 동안 늘 두세 사람 정도만 마주쳤다. 어떤 날은 온전히 나 혼자만 들기도 했다. 그런 호젓함이 좋은 산이었다. 전에 서울 살 때도 뒷산이 있었다. 거기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이 귀찮은 동네는 사람이 살 만한 동네는 아닌 것이었다.

 

길 가운데 개똥 두 덩이가 놓여 있고 파리들만 신났다. 개를 오래 키우다 보면 개를 닮아가는 걸까, 사람이 다른 사람 생각을 한다면 제 개똥 저렇게 방치하고 가지는 못할 것이었다. 개새끼, 라고 무심코 내뱉었는데 결국은 나한테 돌아오는 욕이 되었다. 사람은 많아졌는데 사람다운 사람은 더욱 만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저와 자식밖에 모르는 인간이 너무 많아졌다.

 

똥이 귀한 대접 받던 시절도 있었다. 긴 동짓달 밤에 꼬맹이들이 모여 놀 때면 꼭 제 집에 가서 뒤를 보고 오는 동무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산에서 하얀 휴지를 만나면 가까이 안 가는 게 상책이었다. 개나 사람이나 뒷자리가 지저분한 것은 똑 같았다. 토끼나 염소 똥처럼 귀엽게 생긴 똥도 있었다. 고양이는 흙을 덮어 제 뒷가림을 할 줄 알았다.

 

조용한 숲에서 낙엽 밟는 바스락 소리가 났다. 사람 발자국 소리인가 해서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했다. 후다닥 도망가는 고라니 꽁무니가 보였다. 저 짐승은 왜 저렇게 조심성이 많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혹시 나리가 있을까 싶어 열심히 살폈는데 꽃이라고는 아예 없었다. 꽃이 없으니 숲이 어두웠다.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낼 일이 없어졌다. 이번 주말부터 함백산 만항제에서 야생화축제가 열린다고 하였다. 휴가철 사람 범벅이 싫어 가지 않기로 하였다.

 

지금까지 산 일이 잠깐 돌의자에 앉아 있었을 때 한순간 꾼 꿈이 아니었을까? 나는 왜 나무가 아니고, 풀이 아니고, 사람으로 여기 있는 걸까? 길이 출렁이고, 숲이 흔들렸다. 중력이 사라진 듯 몸이 가벼워졌다. 전율이 짧게 나를 지나갔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이 모두가 충만이었다.

 

이름도 없는 봉우리에서 한참을 쉬었다.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나르느라 개미들이 더 부산해졌다. 앞으로 천 년 뒤의 지구에서 인간이 없을 확률은 높겠지만 개미는 틀림없이 남아 있을 것이다. 영리하고 강하다고 우주는 선택해주지 않는다. 인간이 사라진다고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인간의 폐허 위에 개미들의 집이 마천루처럼 솟을 것이다. 우리는 지구별에 잠시 스쳐가는 나그네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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