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숲의 인문학

샌. 2013. 7. 30. 10:35

지은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책을 보다가 중간쯤 읽고서야 여자인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왜 당연히 남자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되돌아 생각해 보니 이 책은 지은이가 효소 재료를 채취하고 약초를 캐러 산을 돌아다닌 이야기니 응당 남자 일이라 여겼던 것 같다. 다른 하나는 글에 있었다. 소설가 김훈이 떠오르는 간결한 단문형 문체는 여성이 쓴 글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김담과 김훈, 외글자 이름도 닮았다.


누군가 생선가시 같다고 했던 이런 문체를 나는 좋아한다. <숲의 인문학>을 읽으면서 군더더기 없는 짧은 문장의 매력에 빠졌다. 특히 사투리가 어우러진 우리말이 감칠맛을 더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다.


"산뽕나무 아래서 이제 막 익기 시작한 녹두알만 한 오디들을 나뭇가지를 끌어 잡고 바로 입을 대고 따서 먹었다. 달곰했다. 히물히물 웃음이 났으나 웃음 끝에 더불어 나눴으면 하는 아쉬움이 슴샜다."


"모처럼 오동나무 가지에 저녁 반달이 곱게 걸렸다. 폭염과 열대야에 시달리던 몸이 한순간 고즈넉해졌다. 방 안은 웅신했으나 해가 진 문밖에는 바람이 선들거리며 지나갔다. 입에 칫솔을 문 채 한동안 마당을 서성거렸다. 동쪽 숲에서는  수리부엉이가 울었으며 서쪽 숲가에서는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소쩍새가 길게 울었다. 어느 계절에 서 있는지 문득, 잊었다."


"바야흐로 크고 둥근 해가 졌다. 해가 지는 자리는 날마다 조금씩 바뀌었다. 때 아닌 황사에 목 안이 칼칼하고 눈알이 씀벅이는 것도 참고 무연히 지는 해를 봤다. 희미했던 반달이 은빛으로 도드라졌다. 가고 오는 일이 이처럼 정연하다면 좋을 것이었다."


"눈길 위를 걸어온 신발 바닥은 눈과 같이 희었다."


책 내용은 단순하다. 집과 숲을 오간 일기 형식의 기록이다. 글에는 온갖 식물과 동물이 나온다.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흔한 생명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비슷한 이야기들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었다. 아날로그적 향수가 느껴지는 글이었다. 노인들만 남은 농촌의 현실, 산골까지 파고든 돈의 논리, 무분별한 개발과 망가지는 숲, 소통되지 않는 부모와의 관계 등과 같이 공감하면서 아파할 내용이 들어있다.


책에 나온 내용으로 보건대 지은이는 일찍 고향으로 귀촌해 부모와 함께 세 식구가 살고 있다. 강원도 고성에 있는 건봉산 자락 어드메쯤이다. 책 읽고, 글 쓰고, 산에서 야생초를 채취하는 게 일과인 것 같다. 반문명적 삶을 지향한다는 것 외엔 다른 건 자세히 알 수 없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지은이가 쓴 책이 두 권 더 있다. <산책>과 <그늘 속을 걷다>다.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책 제목이 왜 <숲의 인문학>일까? '인문학'이라 해서 처음에는 숲에 대한 이론서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학문 냄새가 나는 단어나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 두 발로 걸어 다닌 숲의 이야기다. 도시에서 책상에 앉아 자연 생태를 말하는 것에 대한 비아냥으로 일부러 '인문학'이라는 말을 쓴 건 아닐까?


지은이의 글 중에서 하나를 옮긴다. 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유일한 글이다.

 

 

생활 속 속도


마른하늘에 눈도 내리지 않는 강추위로 바싹 몸이 얼었다. 어릴 때 걸렸던 동상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반복해서 증상을 드러냈다. 팥알만 한 붉은 반점들이 돋아나고 맹렬히 가려웠다. 어릴 때 할머니는 메주콩 자루 속에 발을 넣게도 하고, 세숫대야에 오줌을 받아 발을 담그게도 했지만 크게 효험을 본 기억은 없었다. 얼음판에서 해종일 빙구를 타다가 등하굣길에 징검길을 잘못 디뎌 물속에 빠져서 생긴 동상이었지만, 날이 풀리면 또 씻은 듯이 자취를 감췄다. 조개탄과 솔방울을 태우던 교실 안 날로로는 물에 젖은 털신을 말리지 못했다.

개울과 논바닥에 꽝꽝 얼음 얼었어도 누구도 빙구며 스케이트를 타지 않았다. 아이들은 보습학원으로, 입시학원으로 방학이 없었으며 어른들은 텔레비전이라는 감옥에 갇혀 집 밖으로 나서질 않았다. 노인들만 이따금 마을회관에 모여들어 십 원짜리 고스톱 판을 벌일 뿐이었다. 삶이 단순해진 대신 메마르고 삭막해졌다. 사랑방에 모여 앉아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는 일도 이제는 없었다. 가마니를 짤 때면 가마니틀을 안방에 앉혀놓고 물 축인 짚을 들여놓으면 짚 냄새가 훈훈했다. 그 곁 아랫목에서는 청국장이 익어가고, 콩나물시루에서는 콩나물이 키를 키웠다.

서너 시간 뒤면 서울에 당도할 수 있다고 해서 내 삶이 윤택해지는 것일까. 구불구불 일방통행이었던 진부령 고갯길은 날이 갈수록 직선으로 바뀌어갔으며 기스락은 점점 더 강파르게 치솟았다. 가속 페달을 밟은 것처럼 숨은 가쁘고 정신은 사나웠다. 춥고 시린 얼굴로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슬픈 영화처럼 막막해 보였다. 시골 버스터미널 대합실에 그 흔한 갈탄난로조차 설치하지 않은 태도가 도심 속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얼굴에서도 고스란히 엿보였다. 바위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형국이었다.

마을마다 이장선거 후유증을 앓았다. 전과 달리 농촌개발 사업이 많아지면서 이권에 개입할 여지가 충분해진 까닭이었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수십억 대에 이르는 사업은 흔치 않았고, 행정기관에서 보조를 하는 대신 마을에서 감사의 인사치레로 쌀가마니나 걷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젠 그렇지 않았다. 생계가 넉넉해진 것만으로는 내남없이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을의 이장은 흔히 원로가 맡거나 아니면 원로들이 신임하는 젊은 사람을 밀어서 일을 맡아보게 했지만 요새는 점점 부패한 정치판을 닮아가고 있었다.

자가용으로 인해 생활 패턴이 바뀐 까닭일 것이었다. 버스로 속초 시내를 한번 다녀올라치면 거진 하루를 보내야 했던 것과 달리 승용차로는 왕복 한 시간이면 넉근했다. 농번기 때 읍내 다방에서 커피를 배달시키고 점심으로는 읍내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주문하는 일은 이제 다반사였다. 외식을 하는 횟수도 잦아졌으며 속초 시내 대형 할인매장을 이용하는 경우도 늘었다. 음식을 주문하면 승용차로 배달되었다. 어른들은 이구동성 세상이 좋아졌다고 했다.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고 해서 한가롭고 여유 있느냐고 하면 갸우뚱 고개를 저었다. 더욱 바빠졌을 뿐이었다.

마치 '웰빙'을 살기 위해 쉴 새 없이 고군분투해야 하는 삶과 닮았다. 선택하고 배제하는 게 사람의 골격이라면 취사선택 여하에 따라 삶의 행방이 달라질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어느 길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일 테다. 컨베이어벨트에 올라앉은 삶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삥삥맬밖에 방도가 없을 것이었다. 컨베이어벨트만이 삶의 길은 아닐 것이었다. 신작로를 이루는 것은 수많은 사잇길이 있은 다음이지만 이제는 신작로만 길이라고 여겼다. 이를테면 적정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승용차, 트럭, 트랙터를 다 갖고 있으면서 지구온난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가당착이었다. 모자라서 불행하기보다 차고 넘쳐서 싸움이 잦았다. 알짬은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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