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달과 토성의 파종법 / 손택수

샌. 2013. 12. 24. 11:13

매달 스무여드렛날이었다

할머니는 밭에 씨를 뿌리러 갔다

 

오늘은 땅심이 제일 좋은 날

달과 토성이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흙들이 마구 부풀어오르는 날

 

설씨 문중 대대로 내려온 농법대로

할머니는 별들의 신호를 알아듣고 씨를 뿌렸다

 

별과 별 사이의 신호를

씨앗들도 알아듣고

최대의 發芽를 이루었다

 

할머니의 몸속에, 씨앗 속에, 할머니 주름을 닮은 밭고랑 속에

별과의 교신을 하는 무슨 우주국이 들어있었던가

 

매달 스무여드레 별들이 지상에 금빛 씨앗을 뿌리던 날

할머니는 온몸에 별빛을 받으며 돌아왔다

 

- 달과 토성의 파종법 / 손택수

 

 

이탈리아의 악기 제작 명장이 바이올린을 만드는 데 쓸 나무를 고를 때, 나무의 나이나 재질만이 아니라 달의 위치까지도 고려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달이 수평선에 낮게 떠 있고 지구에서 가장 멀어진 때가 달의 인력이 작아 수액이 나무에 적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나무 중심부가 건조해야 견고하면서 깊은 울림을 준다고 한다. 자연에는 우리가 모르는 경이로운 일들이 많다.

 

이 시를 읽으면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말 속에도 깊은 의미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별과 별 사이의 신호를 씨앗이 알아듣고 최대의 발아를 이루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그 신호를 알아듣는 육감의 채널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런 우주 감각을 잃었다. 우주에 존재하는 물체 사이의 연관성을 읽는 능력은 퇴화했다. 우리가 비과학적이라고 배척하는 것들 중에 세계의 진실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우주, 그리고 우리의 삶은 상상하는 이상으로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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