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단주

샌. 2013. 12. 26. 13:08

올해 일어난 변화 중 제일 으뜸이 술을 끊은 것이다. 지난 6월에 단주를 결심하고 지금까지 잘 지켜왔으니 술잔을 입에 대지 않은지가 여섯 달이 되었다. 되돌아보아도 참 잘한 결정이었다. 앞으로도 다시 술을 가까이할 일은 없을 것이다.

 

술은 마실 때는 흥겹지만 뒷날은 고약했다. 후회하면서도 습관적으로 마셨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감당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필름이 끊기는 건 물론이고 집에 찾아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늙은이의 추태를 보였다. 또 술에 취하면 공격적이고 비판적이 되어 옆에 있는 사람을 괴롭게 했다. 확실한 해결책은 술을 끊는 것밖에 없었다. 적당히 절주하면 되지 않느냐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되었다.

 

전에 있었던 일 중에 제일 아찔했던 건 골목에 주차해 놓은 트럭 밑에 들어가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면 아무데서나 누워 잤다. 경찰이 깨워준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날 새벽에 일하러 나가던 운전사가 보지 않았더라면 황천으로 갔을지 몰랐다. 조심해야지 하면서도 술을 끊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난여름 공공장소에서의 실수가 단주를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다. 일흔이 되신 선배가 뒤치다꺼리를 하고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사건 뒤로 전화만 드렸을 뿐 면목이 없어 다시 만나지 못하고 있다. 술버릇이 나쁘다는 얘기는 듣지 않았는데 어쩌다 뿅 가버리면 통제가 안 되는 게 문제였다. 나이가 들수록 그 빈도가 잦아졌으니 이제야말로 술을 버려야겠다는 계시가 벼락처럼 왔다. 일신의 문제보다도 남에게 주는 피해가 더 두려웠다.

 

단주하고 보니 우선 몸이 깨끗해서 좋다. 주취 후유증으로 시달릴 일이 없다. 알코올의 유혹을 잠깐만 이겨내면 된다. 술이 주는 멋과 낭만을 모르는 건 아니다. 비 온다고 한 잔, 바람 분다고 한 잔, 반찬이 좋다고 한 잔이었지만, 눈 딱 감으니 충분히 참아낼 수 있다. 하나를 희생하고 얻는 이득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단주를 지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40년을 함께 해 온 술을 끊은 데는 백수로 살아가는 덕분이 크다.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면 스트레스 때문에 술을 피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술을 가까이할 요인이 많이 줄어들었다. 사람들 만나는 일이 별로 없으니 힘들게 술을 사양하지 않아도 된다. 만나더라도 예전처럼 술을 강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집에서 혼자 홀짝거리는 습관을 버리는 데 더 인내가 필요했다.

 

어쩌다 모임에 나가면 술 끊게 된 사연을 궁금해하며 묻는다. 큰 실수담이라도 펼쳐놓아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너무 싱겁게 끊었으니 좌중을 즐겁게 해 줄 이야기가 없다. 싱거운 건 담배도 그랬다. 10여 년 전에 심하게 감기를 앓고 난 뒤 담배를 물었더니 너무 썼다. 이참에 금연을 해버리자 마음먹은 게 20년 넘게 피운 담배를 끊게 되었다. 담배나 술 모두 수월하게 끊은 셈이었다.

 

술을 끊고 나서는 군것질이 늘었다. 전에는 떡이나 과자는 쳐다보지 않았는데 이젠 수시로 손이 간다. 식사량도 많아졌다. 그러나 술 마실 때 폭식하는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말도 술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최근에 좀더 수다스러워진 것은 확실하다. 전에는 쌓아두었던 감정을 술로 풀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어떻게든 그때그때 해결해야 한다.

 

술이 없는 삶은 채도가 빠진 사진 같이 밋밋하게 보일 수도 있다.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사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술을 끊고 보니 술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되돌아보면 술에 대해서는 좋은 것보다는 부끄럽고 잊고 싶은 기억이 훨씬 더 많다. 이것만으로도 술을 끊기 잘했다고 자위를 한다. 겉으로는 건조해 보여도 그 색깔 나름대로의 감성이 있는 법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내가 술을 끊게 된 것도 그 때가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연스레 찾아온 변화가 반갑다. 이 또한 인생의 재미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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