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세상에 예쁜 것

샌. 2014. 2. 3. 09:05

박완서 선생이 2011년에 돌아가시고 난 뒤에 출간된 산문집이다. 선생이 말년에 쓰셨던 글을 모았다. 선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책에서도 따스한 사람의 향기가 난다. 마음씨 고운 이웃집 아주머니처럼 포근하다. 글을 쓰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되는 게 먼저라는 걸 선생에게서 배운다.

 

책 제목으로 된 '세상에 예쁜 것'이라는 글에서는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추억하고 있다. 실명이 나오지는 않지만, 김점선 화가에 대한 내용으로 보인다. 죽기 엿새 전 병실을 방문했을 때 아들 내외가 간병하고 있었는데 5, 6개월쯤 되는 손자도 있었다고 한다. 아기가 병실에 있는 게 안돼 보였는데 고통스럽던 병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면서 시선이 멈춘 곳은 잠든 아기의 발바닥이었다. 포대기 끝으로 나온 아기 발바닥의 열 발가락이 "세상에 예쁜 것"이라는 탄성이 나올 만큼, 아니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는 것이다. 임종의 자리에서도 병자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새 생명에 대한 찬탄의 글이다.

 

선생이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 계기를 밝힌 글도 있다. 선생은 대학에 입학하고도 6.25가 일어나는 바람에 몇 달밖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전쟁의 와중에서 젊은 여자란 잔혹한 세상의 좋은 먹이였다. 온갖 못 볼 꼴을 보았고,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자들로부터 수모와 박해를 당하면서 그들 앞에서 벌레처럼 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 선생의 마음에 섬광처럼 번득인 것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등장시켜 소설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만으로도 인간 이하의 수모를 견디는 데 힘과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려는 욕구가 선생에게는 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여린 생명에 대한 애틋한 관심과도 일맥상통한다.

 

외아들을 잃었던 고통의 나날에 대한 묘사도 선생의 글에서는 자주 보인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마음이 다 비슷할 것이다. 어디선가에서 선생은 말했다. "고난은 나를 소설가로 만들기 위한 단련기였다." 슬픔과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고난을 통해 맛깔나게 익어가는지도 모른다.

 

선생의 작품으로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모독> 등의 책을 읽어 보았다. 오래전 일이다. 소설은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다. 선생은 40세의 나이에 <나목>으로 등단했다. 숨어 있던 글쓰기의 열정이 늦게서야 폭발한 것이다. 

 

선생은 소녀 같은 수줍은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계셨다. 선생을 보면 늙어간다는 것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깨달음이 깊어지고 정신이 성숙한다는 건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선생의 나이듬 예찬이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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