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모퉁이 / 안도현

샌. 2014. 11. 2. 12:14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 테고

하굣길에 그 계집애네 집을 힐끔거리며 바라볼 일도 없었겠지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거야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 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 훗날, 내가 너를 배반해 볼 꿈을 꾸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골목이 아냐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남자가 아냐 여자들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 모퉁이 / 안도현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한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시 창작 수업 첫 시간이면 학생들에게 북어를 다섯 시간 동안 관찰한 뒤 시를 써오라는 과제를 낸다고 했다. 건성건성 한 학생과 오랫동안 북어를 바라보고 쓴 글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고 했다. 시인이 되는 첫째 조건, 사물을 '자세~~~~~~~~~~~히'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인이 시를 쓰는 자세는 소심하고 째째하다고 말했다. 좀 더 나은 표현이 없나 고민하면서 수없이 고치기를 반복해서 세상에 내놓기 때문이다. 시 한 편이 태어나는 게 얼마나 난산인지를 알겠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모퉁이를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보았을지 머리에서 되새김했을지를 생각하면 허투루 읽고 지나칠 수 없다.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라는 표현은 참 좋다.

 

도시에서는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골목이 사라지고 모퉁이가 사라지고 있다. 피맛골을 없앤 건 모퉁이를 싫어하는 현대 정신이었다. 그놈은 추억과 그리움, 인간적인 따스함까지 통째로 쓸고 가버리는 쓰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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