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허균의 생각

샌. 2015. 3. 21. 12:27

허균(許筠, 1569~1618)은 매력적인 인물이다. 나는 이런 반골 기질에 끌린다. 허균은 성리학과 유교적 가치관을 하찮게 여기고 지배 이념에 정면으로 저항했다. 비록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그의 정신은 수많은 조무래기 사이에서 우뚝하다.

 

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며 편안하게 일생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적시하고 저항적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허균은 당연히 후자에 속한다. 비록 소수지만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역사는 빛난다.

 

이이화 선생이 쓴 <허균의 생각>은 허균이 쓴 글을 중심으로 정치, 학문, 문학, 세 분야에서 허균이 어떤 사람인지 밝힌다. 내용이 건조하긴 하나 대신 객관적이다. 허균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초판이 1980년에 나왔는데 서슬 퍼렇던 당시에는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허균은 민중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으로 나누었다. 항민은 무식하고 천하며, 자기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나 지식이 없는 우둔한 민중이다. 위정자에게 가장 좋은 수탈의 대상이며 먹잇감이다. 원민은 수탈당하는 계급이라는 점에서는 항민과 같지만 항민과 달리 '나는 왜 압박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품고 스스로의 처지가 부당하다는 것을 깨닫는 무리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소시민이나 자신의 안일만을 찾는 나약한 지식인과 비슷하다.

 

반면에 호민은 시대의 사명을 스스로 깨달아서 남과 사회와 국가를 나와 관계지을 줄 알고 자기가 받는 부당한 대우나 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하는 무리이다. 이들은 비겁하지도 않고 나약하지도 않으며 자기의 신념을 지키며 사회 개조를 지향한다. 호민이 앞장 설 때 원민은 좋은 협력자가 되고, 항민 또한 그들을 따르는 세력이 될 수 있다. 호민에 의해서 세상은 개혁되고 새로워진다.

 

이런 생각을 밝힌 글 제목이 '몽둥이와 쇠스랑을 들고 일어서는 백성들'이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허균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가 이로써 분명하다. 그런 혁명 의지는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동전>에서도 그려지고 있다.

 

허균은 명망 있는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주가 있었지만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소외 계층과 사귀면서 사회 개혁을 꿈꿨다. 유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또한 천주교 서적을 맨 처음 들여온 것도 허균이었다. 저자인 이 선생이 말한 대로 '인간을 사랑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허균은 인본주의자면서 자유주의자였다. 그러나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 기득권층에서 볼 때 허균은 골칫거리였고 위험인물이었다.

 

아쉬운 점은 마지막까지 정치에 뜻을 두지 말고 본인이 쓴 <한정록>의 삶을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니면 왕정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해 보고 장렬하게 전사했더라면 답답함이 덜할 것 같다. 삶의 끝이 그렇게 될 줄은 아마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요, 예법 행검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을 냈으니 내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은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린 성품은 감히 어기지 않겠다." 유교의 윤리관에 갇힌 당시의 조선 사회에서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다는 데 허균의 위대함이 있다. '문파관작(聞罷官作)'이라는 시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禮敎寧拘放

浮沈只任情

君須用君法

吾自達吾生

 

예의 가르침이 어찌 호방한 삶을 얽어매랴

세상살이는 제 뜻에 맡길 뿐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이나 써야 할 것이요

나는 내 인생을 나대로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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