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무척 덥다. 어제는 우리 지방 낮 최고기온이 35℃까지 올랐고, 서울은 36℃를 넘었다. 이번 더위는 습도가 높아서 사우나실에 있는 것 같은 찜통더위다. 기상청 자료를 보니 8월 들어 평균습도가 79%로 예년보다 훨씬 높았다. 올초 캄보디아에 갔을 때도 덥긴 했지만 가만히 있거나 그늘에 들어가면 땀이 잦아들고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하지만 습도가 높은 우리나라 더위는 그늘에 들어가도 소용이 없다.
다행히 내가 사는 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달아오른 시멘트 도시의 열기는 피할 수 있다. 낮에는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켜지만 저녁이 되면 서늘한 바람이 분다. 한밤중에는 창문을 닫아야 할 정도다. 낮의 열기가 그만큼 쉬이 사그라진다. 어제 만난 서울 사는 지인은 열대야로 잠을 설친다고 불평을 했다. 바둑에 진 것도 그 탓으로 여기는 듯했다. 비싼 집 팔고 우리 동네로 이사 와서 여유롭고 시원하게 살라고 충고를 했지만 들을 리는 만무할 것이다.
더울 때는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것이 여름을 건강하게 보내는 방법이 아닐까.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지만 기세가 왕성한 젊을 때의 얘기다. 옛날 같으면 원두막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거나, 만화책을 쌓아두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을지 모른다. 그 정도면 손부채 하나로도 넉넉히 여름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여름에 자주 먹는 음식이 미숫가루다. 어렸을 때 먹던 미숫가루가 생각나서 아내한테 사 달라고 부탁했다. 설탕과 얼음을 넣고 타 먹는 고소하고 달콤하고 시원한 미숫가루의 맛이 떠올라서였다. 그때만큼의 맛은 아니지만 미숫가루를 마시면서 과거의 따스했던 시절로 돌아간다. 그 시절은 집에서 미숫가루를 만들면 가족만 먹는 게 아니었다. 친척이나 이웃에게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내 30대 때까지만 해도 여러 집에서 보내주는 미숫가루를 맛볼 수 있었다. 곡식을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맛이 달랐으니 집집마다 다르게 내는 맛에 재미있어했던 기억이 난다.
또 하나 떠오르는 음식은 빙수다. 여름이 되면 동네 골목에 리어카를 끌고 빙수 장사가 찾아왔다. 하늘색으로 칠해진 빙수 기계로 얼음을 갈면 얼음 가루가 그릇에 수북이 쌓인다. 거기에 진한 빨간색과 노란색 등의 액체를 붓고 뭔지 모르는 가루를 뿌려주었다. 그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란! 그 당시 빙수는 얼음이 갈리는 사각사각거리는 소리, 하얀 빙수와 어우러진 원색의 색감 등 시청각의 완벽한 조화였다.
20년도 더 전이었을 것이다. 아내가 조그만 가정용 빙수기를 사서 집에서 옛날 빙수를 재현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얼음을 갈아 빙수를 만들면 그 위에 단팥을 올리고 옛 맛과 비스무리하게 만들어 먹었다. 빙수 만드는 재미에 빠졌던 그런 여름도 있었다.
며칠 전 목현천에 나갔더니 길가의 벚나무 잎이 누렇게 변해서 가을 낙엽처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여름 땡볕을 견디지 못하고 나뭇잎도 말라 버린 것이다. 기후 위기가 실감나게 느껴졌다. 여름에 더운 거야 정상이지 싶다가도 우리가 이미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것 같아 섬뜩하다. 그럼에도 인류는 죽음의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문명의 파국이 눈앞에 다가왔건만 우리는 애써 눈을 감는지 모른다.
에어컨이라는 물건이 그렇다. 내 한 몸 시원하게 지내기 위해 집의 열기를 빼내 밖으로 쏟아버린다. 밖은 더 뜨거워지고 타인은 고통을 받는다.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눈물을 필요로 한다. 에어컨은 문명의 이기성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선수촌과 경기장을 오가는 버스에 에어컨을 틀지 않아 원성이 많다는 보도를 봤다. 환경 올림픽을 지향하는 프랑스의 의지는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12시 전인데 벌써 기온은 33℃로 올랐다. 내 옆에서는 선풍기가 돌아가지만 과연 얼마만큼 버틸지 모르겠다. 보통 날 같으면 오후 2시가 넘으면 견디지 못하고 에어컨으로 손이 간다. 혼자서 에어컨 켜 놓고 상쾌하게 지낸다고 상쾌는 아닐 것이다. 오늘은 일찌감치 도서관으로 피신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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