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큰일이다 / 이상국

샌. 2016. 1. 3. 10:35

차 문을 열어두었더니 밤 사이에

뒷좌석과 앞좌석 사이에 거미가 집을 지었다

그러면 거미의 밥을 위하여 나비나 파리도 들어올 수 있게

계속 문을 열어두어야 하는지를 걱정하는 나와

 

미국의 무역센터 빌딩이 쓰러지는 걸 바라보며

어디서 많이 본 비디오 게임 같다거나

북조선이 핵실험을 해도

애써 눈도 꿈쩍하지 않는 이 나는 다르다

 

그러나 사무실 유리벽에 머리를 박고 죽은

이름 모를 새의 주검을 냇가에 묻어 주고

한나절 소주로 음복을 하면서도

시장바닥을 배로 밀고가는 사람의 돈통에

동전을 넣을까 말까 망설이는 나는 또 같은 사람이다

 

한 때 이런 건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언제부턴가 내가 모든 저들일지 모른다는

그런 되지도 않은 생각 때문에

같은 나와 다른 나는 날마다 싸운다

 

오늘도 시청 민원실에 들어가다가

무심코 침을 뱉었는데

화단의 회양목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남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어떡하냐고 한다

 

살아 갈 일이 큰일이다

 

- 큰일이다 / 이상국

 

 

해가 바뀌면 늙고 나이 든다는 생각보다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가 더 걱정된다. 점점 더 옹졸해지고 제 세계에 갇히는 모습이 꼴불견이다. 나잇값을 하며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진보는커녕 제자리걸음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싶을 때도 있다. 몸은 노쇠해질 일만 남았는데 정신의 성숙이라도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겠는가. 정말 살아갈 일이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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