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버버리 곡꾼 / 김해자

샌. 2015. 12. 23. 10:15

봄여름가을 집도 없이 짚으로 이엉 엮은

초분 옆에 살던 버버리, 말이라곤 어버버버버밖에 모르던 그 여자는

동네 초상이 나면 귀신같이 알고 와서 곡했네

옷 한 벌 얻어 입고 때 되면 밥 얻어먹고 내내 울었네

덕지덕지 껴입은 품에서 서리서리 풀려나오는 구음이 조등을 적셨네

뜻은 알 길 없었지만 으어어 어으으 노래하는 동안은

떼 지어 뒤쫓아 다니던 아이들 돌팔매도 멈췄네

어딜 보는지 종잡을 수 없는 사팔뜨기 같은 눈에서

눈물 떨어지는 동안은 짚으로 둘둘 만 어린아이

풀무덤이 생기면 관도 없는 주검 곁 아주 살았네

으어어 버버버 토닥토닥 아기 재우는 듯 무덤가에 핀

고사리 삐비꽃 억새 철 따라 꽃무덤 장식했네

살아서 죽음과 포개진 그 여잔 꽃 바치러 왔네 세상에

노래하러 왔네 맞으러 왔네 대신 울어주러 왔네

어느 해 흰 눈 속에 파묻힌

 

- 버버리 곡꾼 / 김해자

 

 

과거 힘들었던 시절엔 이런 사람들 많았다. 내 한 입 연명하기도 고단한데 정신줄 놓은 가족이나 이웃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국가도 아무 힘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사변을 저지르며 이런 사람들을 양산해 냈다. 내 친척 중에도 군대 갔다가 이유 없이 바보가 되어 온 사람도 있었다. 어릴 때 아팠다가 치료받지 못한 후유증을 앓는 사람도 많았다. 버려진 사람들은 이 동네 저 동네 떠돌며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핍박받다가 사라져 갔다. 시에 나오는 버버리 곡꾼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말은 못하지만 제 슬픔이 어찌 덮어지겠는가. 버버리 곡꾼은 그나마 곡을 함으로써 제 한을 풀어냈는지 모른다. 인간의 고통을 대신 한 몸에 짊어졌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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