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안나푸르나에서 밀크티를 마시다

샌. 2017. 10. 2. 11:01

이 책을 읽으며 8년 전 랑탕과 고사인쿤트 트레킹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새겨졌다. 긴 일정이나 5,000m에 달하는 최고 고도가 저자가 체험한 안나푸르나 라운딩과 비슷했다. 우리도 추운 1월에 히말라야를 걸었다. 다만 우리는 12명의 단체 트레킹이어서 포터만 데리고 홀로 걸은 저자와는 처한 입장이 달랐다.

 

<안나푸르나에서 밀크티를 마시다>는 '2014년 1월 1일, 사직서를 냈다'로 시작한다. 33살의 여자는 그렇게 네팔로 떠났다. 그리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와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을 연이어서 했다. 이 책은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에 대한 기록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에 대한 책은 매우 많다. 신선함과 참신성에서 이 책은 뛰어나다. 문장은 통통 튀는 살아 있는 비유와 재치로 넘쳐난다. 마치 현장에서 같이 걷는 듯 생생하다. 경쾌하고 솔직한 히말라야 여행기다. 내가 랑탕에 대해 썼던 글을 읽어보니 딱딱한 보고서 식으로 이 책과 비교가 되어 도저히 봐 줄 수가 없다. 저자의 글솜씨가 부러울 뿐이다.

 

내 경우는 랑탕을 가기 위해 장만한 장비가 150만 원어치나 되었다. 그것도 메이커가 아닌 시장 상품인데도 그랬다. 겨울 트레킹에서 제일 중요한 침낭은 빌렸다. 얇은 침낭이어서 추위 때문에 엄청 고생했다. 설상가상으로 보온을 위해 침낭 안에 넣어두는 뜨거운 물을 담은 물통이 터져 버려서 더했다. 저자는 핫팩을 사용했는데 오히려 그게 나을 뻔했다.

 

겨울 히말라야는 추위와 고산병과의 전쟁이다. 산 속에서는 씻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 먹고 자고 싸는 게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고통 그 자체다. 고산에서는 소화도 잘 안 되고 음식 맛도 잃는다. 이 책 제목에 '밀크티'가 들어가 있는데, 그나마 맛나게 먹었던 게 밀크티였다. 에너지 보충제로도 최고였다.

 

랑탕과 고사인쿤트를 걸으며 수도 없이 포기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그때까지의 돈과 노력이 아까워 버텨냈다. 그 고생을 했는데 다시 히말라야가 그리운 건 왜일까. 해산한 여인이 출산의 고통을 잊어버리듯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면 모든 게 눈 녹듯 사라진다. 다시 가리라고 다짐했는데 어느덧 8년의 세월이 흘렀다.

 

60대 중반이 되었으니 젊은이처럼 무모하게 도전할 수는 없다. ABC 정도가 적당하지만 그냥 포카라에서 빈둥거리다가 푼힐 정도의 가벼운 트레킹이 맞을 것 같다. 다시 떠날 수 있다면 말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사그라진 히말라야의 꿈이 되살아난다. 랑탕에 같이 갔던 팀이 3년 뒤에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했다. 나도 집에 우환이 생기지 않았다면 참여했을 것이다. 안나푸르나 라운딩은 이 책을 통한 간접 경험으로 만족한다.

 

이 책이 술술 읽히는 이유는 저자의 솔직하면서 유머러스한 글맛에 있다. 히말라야 경험이야 누구에게나 대동소이할 것이다. 똑같은 롯지에서 묵으며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길을 걷는다.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내느냐가 중요하다. 앞으로 어느 길을 걸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식의 여행기는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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