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샌. 2017. 9. 27. 07:47

여행 중에 다시 읽어본 책이다. 릴케가 첫번째 답장을 쓴 1903년은 릴케의 나이 28세일 때로 이미 많은 시를 발표하며 명성을 높이고 있을 때였다. 또 몸이 쇠약해서 이탈리아의 휴양도시인 비아레지오에서 쉬고 있었다. 시인이 되기를 지향하는 생면부지의 젊은 청년에게 이토록 친절하고 다정한 충고를 했다는 데서 문학과 사람을 대하는 릴케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다. 편지 교환은 1908년까지 계속된다.

 

꼭 문학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삶을 대하는 릴케의 진지한 충고는 귀담아들을 만하다. 인생의 가치는 외적 성공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다. 편하고 쉬운 길보다 어렵고 무거운 길을 가야 한다. 자기 내면의 고독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릴케는 시인이 되기를 바라는 청년에게 마치 구도자 같은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릴케 자신이 걸어온 길이기도 했다.

 

총 열 통의 편지가 실려 있지만 전체 내용의 요약은 첫번째 편지에 담겨 있다. 그중의 한 부분을 음미해 보며 자꾸 경박한 쪽으로 흘러가는 내 삶을 반성해 본다.

 

 

당신에겐 단 한 가지 길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 속으로 들어가보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이것을 무엇보다 당신이 맞이하는 밤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는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답을 얻으려면 당신의 가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십시오. 만약 이에 대한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즉 이 더없이 진지한 질문에 대해 당신이 "나는 써야만 해"라는 강력하고도 짤막한 말로 답할 수 있으면, 당신의 삶을 이 필연성에 의거하여 만들어 가십시오. 당신의 삶은 당신의 정말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까지도 이 같은 열망에 대한 표시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연을 향해 다가가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은 것에 대해서 마치 이 세상의 맨 처음 사람처럼 말해보십시오. 사랑 시는 쓰지 마십시오. 이처럼 우리에게 너무 흔하고 평범한 것들은 우선은 피하도록 하십시오. 그것들은 다루기가 아주 힘듭니다. 왜냐하면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훌륭하고 탁월한 작품들이 무진장한 곳에서 당신의 개성을 보여주려면 크고도 완전히 성숙한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반적인 주제는 피하고 당신의 일상생활이 제공하는 주제들을 구하십시오. 당신의 슬픔과 소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편린들과 아름다움에 대한 당신 나름의 믿음 따위를 묘사하도록 해보십시오. 이 모든 것들을 다정하고 차분하고 겸손한 솔직함으로 묘사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당신 주변에 있는 사물들이나 당신의 꿈 속에 나타나는 영상들과 당신의 기억 속의 대상들을 이용하십시오.

 

당신의 일상이 너무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당신의 일상을 탓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당신 스스로를 질책하십시오. 당신의 일상의 풍요로움을 말로써 불러낼 만큼 아직 당신이 충분한 시인이 되지 못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진정한 창조자에게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보잘것없어 보이지 않으며 감흥을 주지 않는 장소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당신의 귀에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감방에 당신이 갇혀 있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을, 왕이나 가질 수 있는 그 소중한 재산을, 그 기억의 보물창고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곳으로 당신의 관심을 돌리십시오. 까마득히 머나먼 옛날의 가라앉아버린 감동들을 건져 올리려고 애써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개성은 더욱 확고해질 것이고, 당신의 고독은 더욱 넓어질 것임벼, 당신의 고독은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리 비껴가는, 어둠에 잠기기 시작한 집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카푸스씨, 내가 당신께 드리고 싶은 충고는 이것입니다. 당신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가 당신의 삶의 샘물이 솟아나는 그 깊은 곳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 원천에 도달하여 당신은 당신이 꼭 창작을 해야 하는지의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더 이상 그것을 캐묻지 말고 거기서 들려오는 대로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아마도 당신이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답이 나오겠지요. 그러면 그 운명을 받아들여, 그것을 짊어지십시오. 그 운명의 짐과 그 위대함을 말입니다. 그리고 혹시 바깥세계로부터 무슨 보상이 올까 하는 물음은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창조자는 자체가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내면에서 그리고 자신과 한 몸이 된 자연에서 구해야 하니까요.

 

어쩌면 당신이 당신의 내면과 당신의 깊은 고독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나온 후 시인이 되겠다는 당신의 소망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내가 당신한테 요구한 이 같은 자기 내면에의 탐구가 전혀 헛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 어쨌든 당신의 삶은 가야 할 나름의 길을 찾아 나설 테니까요. 그리고 그 길이 훌륭하고 풍요롭고 드넓은 길이 되기를 나는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당신께 기원합니다.

 

내가 이 이상 무슨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적절하게 다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당신의 모든 성장과 발전을 조용하고도 진지하게 이어나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꾸만 바깥세계만을 쳐다보고, 당신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 당신의 은밀한 감정을 통해서나 답해질 수 있는 성질의 질문들에 대해 외부로부터 답을 얻으려 할 때처럼 당신의 발전에 심각한 해가 되는 것도 없습니다.

 

고맙게도 나를 믿고 보내준 당신의 시들을 여기 다시 우송해 드립니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보여주신 크고도 진지한 신뢰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과 생면부지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이렇게 솔직하게 답변함으로써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보답해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0) 2017.10.10
안나푸르나에서 밀크티를 마시다  (0) 2017.10.02
몽실 언니  (0) 2017.09.18
한티재 하늘  (0) 2017.09.10
안녕, 내 모든 것  (0) 2017.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