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향기

겨울 갈대

샌. 2018. 1. 29. 11:35

 

누가 갈대를 연약하다 했는가. 찬바람 쌩쌩 부는 겨울 강변에서 몸 굽히지 않고 제 형태 온전히 지켜내는 것은 갈대밖에 없다. 봄에 올 새싹들에게 자리 물려줄 때까지 굳건히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 갈대다. 한 생을 마감했지만 그 생을 견뎌낸 의지만은 청청히 살아 있다. 갈대는 흔들리고 또 흔들려서 더 강해진다. 글 한 편을 읽는다.

 

 

겨울 갈대밭에서 / 손광성

 

슬퍼하지 말자. 날카롭던 서슬 다 갈리고, 퍼렇던 젊은 핏줄 모두 잘리고, 눈, 코, 입, 귀, 감각이란 감각들 다 닫혀 버리고, 바람에 펄럭이는 남루를 걸친 채 섰을지라도, 슬퍼하지 말자.

 

찬물에 발목이 저린 이들이 우리들뿐이겠는가. 물방개 같은 것들, 잠자리며 철새 같은 것들, 친구들, 다정했던 이웃들, 그들이 칭얼거리다 간 빈자리에, 아무것도 줄 수 없었던 내 무능의 뜨락에, 바람 말고는 이제 다시 찾아오는 이 없다 해도, 허기와 외로움도 때로는 담담한 여백일 수 있는 것. 다 내 주어서 편안한 가슴들아, 갈대들아.

 

마른 허리 꺾고, 야윈 어깨 더 많이 꺾고, 이제 두레박 들어올려 물 마실 기력마저 부친다 해도 슬퍼하지 말자. 강바람에 서로 몸을 한데 묶어 부축하고 버티면 버티는 만큼 힘이 솟는 겨울. 겨울이 모진 만큼 견디면 또 견뎌내는 것을.

 

찬바람에 이가 시린 이들이 우리들뿐이겠는가. 얼마 남지 않은 체온이나마 마른 몸 비벼 서로 나누어보자. 가난이 파괴하는 것이 인격만이 아니라 해도 헐벗고 굶주려서 오히려 따뜻한 것들아. 갈대들아.

 

세상에 흔들리는 것이 어디 너희들뿐이겠는가. 정에 흔들리고, 이해에 흔들리고, 두려움에 흔들리고, 또 때로는 회의와 외로움에도 자주 흔들리나니, 그 참담한 통한의 아픔을 통해서 모든 아름다운 눈물들이 다시 꽃으로 피어나는 것을. 사랑이란, 진실이란, 죽어서 굳어버린 관념이 아니라 살아서 흔들리며 늘 아파하는 상처인 것을.

 

죽은 관념의 바위들아, 거짓 이념의 깃대들아, 우리의 가슴을 상하게 한 것들이 바로 너희들이었음을 이제 모두는 겪어서 깊이 머리 숙여 아나니. 오히려 흔들려서 더 선량한 마음들아, 어리고 여려서 더 아름다운 갈대들아.

 

이제 안타까운 씨앗들도 멀리 날려보내도, 지나는 바람에도 노상 펄럭이던 잎사귀들, 젊어서 더 아팠던 마음들일랑 죄다 떨구고, 가슴마저 다 비우고, 그리고 수척한 몸뚱어리 하나 이렇게 곧추세워 두는 것은, 그래도 우리가 뒤에 또 다른 봄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니.

 

슬퍼하지 말자. 공허한 마음에 가슴아린 이들이 우리들뿐이겠는가. 우리보다 앞서 떠났던 그때의 우리들처럼, 이제 우리의 발등을 디디고 우리의 어깨를 짚고 또 다른 시퍼런 우리들이 새싹으로 푸른 바람 몰고 일어나 강둑 이쪽에서 저쪽까지 아득히 다시 한 번 서늘한 삶을 나부낄 그날이 오려니, 떠났던 물방개 같은 것들, 잠자리며 철새 같은 것들, 다정햇던 이웃들도 다시 돌아와 서늘한 삶을 누릴 그날이 오려니.

 

슬퍼하지 말자. 뒤돌아보며 떠나는 이들이 우리들뿐이겠는가. 편히 쉬어라. 노년의 머리카락 빛내며 떠나는 것들아. 다 내 주어서 편안한 가슴들아. 잃지 않으면 다시 얻을 수 없음을 우리는 묵묵히 아나니. 흔들리고 또 흔들려서 더 강해지는 것들아. 아름다운 갈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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