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충북선 / 정용기

샌. 2018. 4. 22. 10:44

다음 생에는

충북선 기찻길 가까운 산골짜기에

볕바른 집을 마련해야지.

3, 8일에 서는 제천 장날이면

조치원 오송 충주를 지나오는 기차를 타고

터키석 반지를 낀 고운 여자랑

제천 역전시장을 가야지.

무쇠 솥에서 끓여내는 국밥을 사 먹고 돌아다니다가

또 출출해지면 수수부꾸미를 사 먹어야지.

태백산맥을 넘어온 가자미를 살까

어떤 할미의 깐 도라지를 살까 기웃거리다가

꽃봉오리 맺힌 야래향 화분 하나 사고

귀가 쫑긋한 강아지도 한 마리 사서 안고

돌아오는 기차를 타야지.

손잡고 창 너머로 지는 저녁 해를 보다가

삼탄역이나 달천역쯤에 내려서 집으로 와야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산그늘로 숨어들어야지.

소쩍새 소리 아련한 밤이면

둘이 나란히 엎드려 시집을 읽을까,

스메타나의 몰다우를 들을까.

어쨌거나 다음 생에는

충북선 가까운 곳에 살아야지.

 

- 충북선 / 정용기

 

 

20년도 더 전에 충북선을 탄 적이 있다. 충주에서 있었던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고 제천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젊었을 때는 서울과 고향을 오가는 중앙선을 늘 이용했지만, 그보다는 이런 작은 지선에 대한 기억이 더 선명하다. 20대 때 군대 간 친구 면회하러 장항선을 탔던 일이며, 유치원 다니던 아이들 데리고 경북선을 타고 영주로 갔던 기억이 그렇다.

 

보도를 보면 이제 새마을호도 퇴역한다고 한다. 속도로 경쟁하는 시대에 KTX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옛날에 새마을호는 지금의 비행기 타기보다 더 높이 있었다. 중앙선에는 아예 새마을호가 없었고, 일반 열차가 완행과 우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때는 우등 타기도 어렵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많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시에 나오는 삼탄, 달천이라는 역명이 아련하다. 지도를 펴고 충북선을 찾아본다. 달천, 목행, 동량, 삼탄, 공전, 하나같이 고향 냄새가 나는 따스한 이름이다. 이중에 몇은 이제 열차가 서지 않는 폐역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 그리운 이름을 만나려 충북선을 타보고 싶다. 혹 아는가. 기찻길 가까운 곳에 볕바른 빈집 하나 찾을 수 있을지. 제천 장날이면 기차를 타고 역전시장 구경을 나가기도 하리라. 다음 생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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