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됐심더 / 곽효환

샌. 2019. 2. 1. 11:54

가난하고 쓸쓸하게 살았지만 소박하고 섬세하고 애련한 시를 쓰는 한 시인이 선배 시인의 소개로 고고했으나 불의의 총탄에 세상을 뜬 영부인의 전기를 썼다 불행하게 아내를 잃은 불행한 군인이었던 대통령이 두 시인을 안가로 초대했는데 술을 잘 못하는 풍채 좋은 선배 시인은 그저 눈만 껌벅였고 왜소했으나 강단 있는 두 사내가 투박한 사투리를 주고받으며 양주 두 병을 다 비웠다 어느 정도 술이 오르자 시인의 살림살이를 미리 귀띔해 들은 대통령이 불쑥 물었다

 

"임자, 뭐 도울 일 없나?"

잠시 침묵이 흐르고 시인이 답했다

"됐심더"

 

강과 바다가 만나 붉게 타오르는 강어귀 언덕에서 가난 섞인 울음을 삼키던 여학교 사환이었던 소년은 꿈꾸던 시인이 되어서도 그렇게 일생을 적막하게 살았고 만년을 쓸쓸히 병마에 시달리다 눈을 감았다

 

- 됐심더 / 곽효환

 

 

육영수 전기를 쓴 분으로 이 시의 내용에 맞는 분은 박재삼 시인이다. 함께 한 선배는 박목월 시인이지 싶다실제 있었던 일화일 것이다. 시인은 평생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며 살았지만, "됐심더"라는 한 마디가 시인의 올곧은 성품을 보여준다. 70년대 중반에 박통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이런 말을 아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대통령의 힘을 빌리고파 고개 조아리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삶에 자신과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억만금을 준대도 "아니오!" 할 수 있는 나를 지탱해 주는 그 무엇이 있는가 말이다.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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