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인공지능 치팅

샌. 2022. 12. 26. 10:56

요사이 바둑계가 인공지능 치팅으로 시끌시끌하다. 발단은 지난 21일 춘란배 세계바둑대회 4강전에서 중국의 리쉬안하오 8단이 세계 1위인 우리나라의 신진서 9단을 압도적으로 이기자 중국의 양딩신 9단이 인공지능 치팅을 했다고 주장하면서였다. 양딩신도 8강전에서 리쉬안하오에게 완패를 했다.

 

양딩신은 SNS를 통해 리쉬안하오의 인공지능 치팅 의혹을 제기하며 "리쉬안하오와 20번기를 하고 싶다. 모든 신호가 차단된 대국장에서 화장실을 가지도 말고 대국을 하고 기보로 평가를 받자. 만약 내가 리쉬안하오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라면 바둑계에서 은퇴하겠다"라고 썼다. 중세 식의 결투 신청이다. 그러나 리쉬안하오가 어떤 방법으로 치팅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리쉬안하오는 전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리쉬안하오는 20대 후반인데 실력이 급성장하여 현재 중국 랭킹 2위다. 통상 프로기사의 전성기는 20대 초반이어서 후반이 되면 기력이 하락하는 게 보통이다. 리쉬안하오는 동료 기사들과 연습 대국을 하지 않고 혼자 인공지능으로 공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는 중국 국내대회를 두 번 우승했고 갑조 리그에서는 11승 1패로 다승왕을 차지했다. 또 이번 춘란배 대국에서는 인공지능 일치율이 80%를 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보통 일류 기사의 인공지능 일치율이 60%대이고, 70%을 넘으면 치팅을 의심해 볼 수 있다고 한다. 리쉬안하오가 치팅을 했다는 심증은 있지만 구체적인 물증은 없다. 당사자는 입을 다물고 있다.

 

현재 인공지능 실력은 일류 프로기사가 두 점 내지 석 점의 접바둑으로 해야 상대가 되는 엄청난 수준이다. 승부사들이 인공지능의 유혹을 느낄 만하다. 실제로 2년 전에 김은지 프로가 온라인 대회에서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았다가 자격정지 1년을 받은 바 있다. 작년에는 입단대회에서 이어폰을 이용한 치팅이 발견되기도 했다. 드러나지 않은 것은 더 있을지 모른다.

 

지난가을에는 체스계에서도 큰 사건이 터졌다. 세계 1위인 매그니스 칼슨을 10대 유망주인 한스 니먼이 이기면서 치팅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동안 칼슨은 53승 무패를 기록하고 있었고, 2년 만의 패배였다고 한다. 그만큼 실력차가 있었다. 인공지능의 도움이 아니고는 이길 수 없다고 본 모양이다. 니먼은 억울하다는 입장인데 결국 1억 달러의 명예훼손 소송을 냈다. 앞으로 체스 게임은 치팅을 막기 위해 15분 딜레이 중계를 하기로 했다 한다.

 

가장 유력한 치팅 방법은 인터넷이나 TV 중계 화면을 보고 외부의 공모자가 인공지능을 돌려서 대국자에게 다음 착수를 알려주는 것이다. 몸속에 숨긴 수신기가 진동으로 정보를 전달한다. 이런 치팅을 막기 위해서는 딜레이 중계가 해법이다. 바둑이라면 두세 수 지난 뒤에 화면을 보여준다면 외부와 연결된 치팅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소형 카메라를 옷에 장착하면 어떡하지?) 아니면 전자기파가 완전히 차단된 대국장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창과 방패의 싸움에서는 늘 창이 이겨왔다. 아무리 방패를 잘 만들어도 어떤 기상천외한 치팅 기술이 등장할지 모른다. 앞으로도 보드 게임에서 이런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바둑이 근본부터 변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기존의 바둑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바둑 공부에서부터 검토까지 전적으로 인공지능에 의존한다. 인공지능에 얼마나 가깝게 두느냐가 바둑 실력의 기준이 되었다. 야구에서 타자의 실력을 타율로 평가하듯, 바둑에서는 인공지능과의 일치율로 평가한다. TV 해설을 봐도 "와, 대단합니다. 인공지능이 추천한 수였습니다"라는 멘트를 자주 듣는다.

 

전에는 기사마다 기풍이란 게 있었다. 젊었을 때 다케미야의 호쾌한 우주류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흉내를 내 봤을 것이다. 만약 지금 우주류 스타일의 바둑을 둔다면 승률이 떨어지는 수라고 야단을 맞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나오면서 바둑은 단순화하고 있다. 프로기사 대국을 보면 초반 50수 정도는 그냥 외어서 두고 있다. 뻔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때는 인공지능과도 별 차이가 없다. 바둑 수에 담긴 인간의 멋과 향기가 사라지고 있다.

 

그에 더해 앞으로는 치팅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괜히 상대를 의심하게 된다는 말이다. 전에는 바둑판 앞에 마주앉은 상대의 매너 문제로 심심찮게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지금은 그마저도 인간적으로 보인다. 여전히 인터넷 바둑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이번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진실은 있지만 밝혀지지는 않는다. 치팅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인공지능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려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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