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어른 김장하

샌. 2023. 1. 30. 10:29

MBC TV에서 방송된 2부작 다큐멘터리인 '어른 김장하'를 봤다. 진주에서 남성당한약방을 하며 남몰래 선행을 베풀고 여러 지역사회 운동을 지원한 김장하 선생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선생은 제목에 나오는대로 우리 시대의 '어른'이신 분이다.

 

선생이 세상에 드러나는 걸 고사하셔서 직접 인터뷰는 하지 못하고 선생과 관련된 분들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경남도민일보 기자였던 김주완 씨가 채현국 선생에 이어 다시 훌륭한 분을 소개해주어 고맙다. 언론이나 TV의 역할이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1944년생인 선생은 19세인 1963년에 한약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사천에서 남성당한약방을 열고 박리다매 전략으로 돈을 많이 번다. 10년 뒤 진주로 옮겨서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은 번 돈을 쌓아두지 않고 지역사회에 환원했다. 가난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고, 여러 지역사회 모임이나 운동에 후원했다. 프로그램에 소개된 것만 해도 진주신문, 형평운동, 진주환경운동, 내일을 여는 집, 지리산 살리기, 역사문화 사업 후원 등 헤아릴 수 없다. 1984년에는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하고 나중에는 국가에 헌납했다. 당시 돈으로 100억 원이 넘는 자산이었다고 한다.

 

이런 바탕에는 선생의 약자에 대한 관심과 인간 존중, 그리고 민주화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이다. 한때는 빨갱이 소리까지 들었지만 선생의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가 장학금을 준 학생이 데모로 수배자가 되어 도망다닐 때 선생은 옳은 일을 한다며 격려했다고 한다. 명신고등학교 이사장이었을 때 전교조 파동이 일어났는데 "한 명의 교사도 해임할 수 없다"라고 당국과 의연하게 맞섰다. 선생은 스스로 반골 기질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시대의 불의와 맞서는 결기가 대단하시다. 그런 점이 더욱 존경스럽다.

 

선생은 1920년대에 진주에서 시작한 형평운동을 세상에 알리는 데도 앞장섰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형평운동을 처음 알게 되었다. 형평운동은 백정 출신들이 진주에서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하면서 신분 차별 철폐를 위해 벌인 운동이다. 신분 해방 운동이면서 동시에 진보적인 계급 투쟁의 성격이 있었으며, 선생은 형평운동의 정신을 현대에 되살리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인권의 가치를 높게 본 것이다. 선생의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나중에 찾아와서 "특별한 사람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라고 하자 선생은 이렇게 답했다.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의 삶이나 의식은 보통의 경계를 벗어나신 분이다. "닮고 싶은데 닮을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지인이 이해가 된다. 화면에 비치는 얼굴 표정이나 모습에서도 보통 사람과 다른 결이 느껴진다. 특히 맑고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만약 전생이 있다면 선생은 학덕 높은 고승(高僧)이었을 것만 같다. "참 좋은 사람 만났다."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 운동 기간 중 선생을 만나보고 한 말이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어서 청와대에 초청했지만 선생은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선생은 드러나는 걸 싫어했지만 정치와는 더욱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 같다.

 

다큐멘터리에 나온 선생의 인간적인 면이라면 야구를 좋아하면서 특히 최동원 선수를 좋아한다는 말이었다. 지금은 NC 팬이 되었다고 한다. 가족에게 선생은 어떤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두 손 들었어요." 짧게 등장한 사모님의 말이다. 외부의 선행을 위한 내 의지의 실천은 대개 가족의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선생의 모습은 어땠을지 살짝 호기심이 생긴다.

 

선생은 평생 자가용 없이 검소하게 사신 분이다. 자신이 번 돈은 대부분 사회에 환원하셨다. 작년에 선생은 60년 가까이 운영한 한약방 문을 닫았다. 아파트 생활을 시작하며 "참 호화롭게 살게 되었다"는 말이 따갑게 다가왔다. 이제는 부인을 편하게 해 주면서 살고 싶다는 말도 있었다. 모두가 제 몫 챙기는 데만 몰두하고, 아니 남의 몫을 뺏으려는 도둑놈들만 있는 것 같지만 세상에는 숨어 있는 이런 어른도 계신다. 선생은 앞에 나온 분의 말대로 감히 닮고 싶지만 닮을 수 없는 분이다. 사람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사람의 향기에 푹 취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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