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재미를 버릴 때 찾아오는 재미

샌. 2023. 2. 15. 11:00

교직에 있을 때 나를 괴롭힌 건 선생 노릇에 대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교사는 -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부모의 욕망에 충실히 복무할수록 유능한 교사로 인정받았다.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만큼 불행한 것도 없다. 30여 년의 교직 생활 동안 보람을 느끼거나 재미있게 지낸 적이 없었다. 그저 버텨냈을 뿐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삶이 재미없었던 제일 큰 이유는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미를 구하는 동물이다. 무슨 일을 하건 의미/명분이 있어야 열정이 생기고 재미도 느낀다. 아니면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무기력에 빠진다. 오락이나 쾌락이 위안을 주지만 일시적 도피일 뿐이다. 근원적인 해결 없이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지기만 한다. 용기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현대 사회는 어느 곳이나 썩은 자본주의 정신으로 오염되어 있어서 도찐개찐이기 십상이다. 알고도 모른 척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혹 의미를 찾은들 자기만족일 가능성도 높다. 자신은 나라를 구할 정도의 활동이라고 여길지 몰라도 도리어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근한 예로, 촛불을 든 사람이나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이나 모두 자신을 '애국시민'이라고 칭한다. 실제 그렇게 믿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근면과 성실이 무엇을 위한 근면 성실이냐고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 눈에 안경일 뿐이다. 의미 역시 불완전하긴 마찬가지다.

 

젊었을 때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이 뭔가 재미있는 것을 잔뜩 준비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요사이는 인생에서 과연 재미를 찾을 수 있느냐, 에 회의가 생긴다. 삶 자체가 불확실하고 고통이며, 인간은 실존적으로 외로운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인생사는 우연의 연속이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다른 핑계를 대면서 불행을 위장한다. 심리적인 최후의 방어선인 셈이다.

 

세상은 아름답고 삶은 재미로 가득하다고 인생 찬가를 부르는 사람도 있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질시일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철딱서니 없는 작자로 보인다. 한쪽 눈을 감고 세상의 다른 면을 보려고 하지 않는 청맹과니다. 그가 말하는 재미란 사람들과 어울려 희희덕거리고 이곳저곳 여행 다니며 이런저런 취미 생활을 하는 정도다. 그저 분주한 삶으로 도피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데서 재미를 찾으려고 한다. 인생의 어두운 심연이 두려워서 고개를 돌린들 반짝 효과일 뿐 공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종합해 볼 때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인생에서 재미나 의미를 찾지 말라. 인생은 재미를 제공하는 무대가 아니다.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대신에 삶의 불확실성과 부조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욕망이나 기대를 낮추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해진다. 포기하는 데서 새로운 삶의 활력이 생겨난다. 늙어질수록 체념(締念), 순응(順應) 같은 말을 좋아하게 된다. 소극적인 평안(平安)의 길인 셈이다.

 

나는 인생의 상당 기간을 의미에 집착하며 살았다. 그러나 의미는 객체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자기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의미 자체보다도 세상을 보는 시야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인생을 올바로 살았느냐고 - 이 질문이 정당한지는 모르지만 - 자문할 때 기준은 정견(正見)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인생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이라 느끼는 것은 대양에서 쉼없이 명멸하는 물거품일 뿐이다. 세상적인 재미가 없으면 어떠랴. 재미를 떨쳐버릴 때 인생의 참 재미가 드러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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