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다읽(21) - 걸리버 여행기

샌. 2023. 11. 23. 10:31

'다시 읽기'가 아니라 '제대로 읽기'였다. 이때껏 기이한 여행담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은 당대의 정치 현실과 인간의 본성을 비판하는 풍자 소설이었다. 소인국이나 거인국이라는 소설의 소재도 왜곡된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이지 않나 싶다.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가 쓴 <걸리버 여행기>는 4부로 되어 있다. 1부는 소인국인 릴리펏 여행기, 2부는 거인국인 브롭딩낵 여행기, 3부는 라퓨타, 바니발비, 그립덥드립, 럭낵, 일본 여행기, 4부는 휘넘국 여행기다. 주목할 점은 여행의 후반부로 갈수록 걸리버의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이 넓어지면서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어떤지가 드러난다. 작가는 재미보다는 교훈을 위해서 이 소설을 썼다고 밝혔다. 흥미 위주로 읽을 책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이 속한 시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스위프트는 1726년에 <걸리버 여행기>를 펴냈다. 작가가 살았던 17세기와 18세기 영국의 상황이 이 소설 속에 들어 있다. 특히 휘그당과 토리당의 당파 싸움을 중심으로 한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여행에서 만난 인물들을 통해 비유적으로 그려진다. 브롭딩낵의 현왕(賢王)은 걸리버가 설명하는 영국의 상황을 듣고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 나라 사람들은 자연이 이 세상을 기어다니게 허락해 준 벌레들 중에서 가장 악독한 해충들이다."

 

스위프트의 비판은 휘넘국 여행에서 절정에 달한다. 휘넘국에서는 이성을 지닌 말이 수성을 지닌 인간을 지배한다. 휘넘이라는 고귀한 품성의 말에 비해, 야후라고 불리는 인간은 탐욕과 악덕의 표본이다. 인간의 사악한 속성들이 야후를 통해 속속들이 드러난다. 작가는 지나치다 싶은 정도로 인간을 비하하면서, 동시에 본받아야 할 휘넘의 덕성을 제시한다. 순수한 절대 이성을 지닌 휘넘과 순전히 육욕적인 속성을 지난 야후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두 본성인지 모른다. 걸리버는 휘넘국 여행을 통해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철저히 체험한다.

 

<걸리버 여행기>는 어린이가 읽을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아니다. 당대 현실과 인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하기 위해 모험담이라는 외피를 입혔을 뿐이다. 어쨌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며 다시 읽어 본 <걸리버 여행기>는 너무 새롭게 다가와서 놀라웠다. 특히 걸리버가 여행을 통해 인간 혐오자로 변해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과거에 인기 포털 사이트였던 '야후(Yahoo)'가 이 책에 나오는 야후에서 명칭을 따왔는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인간을 조롱하거나 혐오하는 의미인데 상당히 시니컬한 작명이라 할 수 있다. 또, 일본 에니메이션인 '천공의 성 라퓨타'는 하늘을 나는 섬인 라퓨타국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해 왔을 것이다. 문학적으로는 이 소설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모르지만, 작가가 살았던 시대 환경을 염두에 두고 읽었을 때 상당히 흥미로웠던, 또한 작가의 인간 환멸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 <걸리버 여행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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