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어머니와 고추를 심다

샌. 2024. 5. 2. 09:41

고향에 내려갔더니 마침 고추 모종이 도착해 있었다. 맞춘 건 아닌데 묘하게 때가 맞아 어머니 일손을 덜어줄 수 있었다. 특히 고추 지주대를 세우는 작업은 노모가 하기에는 힘에 겨워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터였다.

 

어머니 농사는 올해 변곡점을 맞았다. 산을 넘어가야 하는 멀리 있는 밭의 들깨 농사를 그만둔 것이다. 어머니는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자식 입장에서는 걱정 하나를 덜어낸 셈이다. 아흔 넘은 노인이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농사를 짓는 게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제 집 가까이 있는 밭만 남았다. 여기에 고추 300포기를 심었다. 

 

 

모판에서는 파릇파릇한 벼 새싹들이 자라고 있고,

 

 

고향집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제비가 찾아왔다. 마을에서 우리집에만 유일하게 제비가 찾아온다. 작년, 재작년에 쓰던 옛 집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재활용을 해도 될 것 같은데 제비는 해마다 수고로이 새 집을 짓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독거노인 도우미가 어머니를 찾아오신다. 치매 예방 활동으로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를 시킨다. 방에 스케치북이 있어 열어보니 어머니가 색칠한 그림이 있었다. 내가 봐도 이만하면 수준급이다. 도우미는 다른 할머니들에게 보여준다면서 사진까지 찍어갔다고 한다.

 

 

둘째 날 저녁에는 동네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 강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개구리 노랫소리가 어울려 귀가 즐거웠다.  

 

 

마을 앞 이팝나무 가로수 길에 하얀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사흘을 지내고 돌아왔다. 내려갈 때는 사인암(舍人巖)과 백두대간 저수령(低首嶺)을 지나 예천으로 도는 우회로를 드라이브를 했다. 산야를 물들이는 봄의 정취를 느껴보고자 함이었다.

 

사인암에서는 산책로를 따라 돌다가 천변에 내려가서 머뭇거렸다. 

 

 

살다 보면 즐거운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고, 노여운 일도 있고, 심드렁한 날도 있다. 그런 날들이 모여 우리네 인생을 만든다. 중요한 것은 곁가지에 매몰되지 않고 중심을 놓치지 않는 일이다. 자질구레한 일에 쓸모없이 감정을 낭비한다면 안 그래도 짧은 인생이 얼마나 허무할 것인가.

 

단원 김홍도의 사인암도는 주변을 과감히 생략하고 바위만 돋보이게 그렸다. 핵심에서 벗어나면 산만해지고 헤매게 된다. 그림이나 인생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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