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호치민 평전

샌. 2012. 2. 28. 08:02

1960년대 중반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면서 베트남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당시에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영화관의 대한뉴스에서 국군이 베트콩을 물리치는 장면이 나올 때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또, 아버지가 면에서 갖고 오시는 월남 소식을 알리는 책이 있었다. 반짝이는 지질에 선명한 칼러사진이 눈을 끌었던 화보였다. 그 책에는 국군의 활약상, 대민봉사하는 모습, 그리고 월남을 소개하는 사진이 많았다. 도대체 전쟁을 하는 나라답지 않게 월남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얀 아오자이에 모자를 쓴 월남 처녀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호지명(胡志明)이라 불린 호치민은 어린 나에게는 악당 월맹의 괴수였다.

몇 년 전에 베트남에서 근무하고 돌아온 친구에게서 호치민이 얼마나 베트남 국민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는지를 들었다. 그리고 호치민의 인격이나 사람됨이 범상치 않다는 말도 들었다. 베트남은 이제 우리와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베트남의 역사나 호치민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다. 그런 이유로 <호치민 평전>을 읽게 되었다. 베트남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듀이커(W. J. Duiker)가 썼는데 1천 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이다.

호치민(1890. 5. 19 - 1969. 9. 2)은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유교적 교육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젊었을 때는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운동을 하다가 수배령이 떨어지자 조국을 떠나 여객선의 요리사 보조 노릇을 하며 세계 곳곳을 떠돌았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 후의 격동의 시기에는 주로 프랑스 파리에 있으면서 공산주의 조직에 가입해 반식민주의 투쟁을 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공산주의를 택한 것은 조국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용주의자면서 온건파에 속했다. 늘 협상과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호치민의 가장 큰 특징은 그만의 소박하고 온화한 인간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선을 수없이 넘고 죽음을 마주하면서도 그는 결코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았다.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열정적으로 다 바쳤으나 권력에 연연하거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공산주의 냉혈한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도 베트남 국민에게 따뜻한 이웃집 아저씨로 남아 있다. 물론 이것을 그의 노회한 이미지 정치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는 아직도 많은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호치민이 다른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와 격이 다른 것은 확실하다. 지도자의 도덕성에서 그는 뛰어나게 우월하다. 비록 공산주의자이긴 하지만 동양의 유교적 전통을 내면에 지닌 보기 드문 지도자다.

그의 소박한 품성을 나타내주는 일화가 있다. 1954년 10월 12일, 프랑스와의 인도차이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호치민은 하노이에 입성한다. 그러나 요란한 개선행진도 기념식도 없었다. 그가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난 것은 17일에 인도 총리가 방문했을 때였다. 왜 기념식을 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호치민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우리의 서로에 대한 사랑은 겉모습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경제 발전과 조국 통일 사업의 진전이 기념식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국과 전쟁을 치를 때 그의 거처는 대통령궁이 아니라 궁 옆에 있는 정원사의 오두막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유언으로 소박한 장례식과 화장을 원했지만 후임자들에 의해 그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존경의 념보다는 자신들 체제의 선전술에 이용하려는 목적이 있지 않았나 싶다.

한 인간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호치민처럼 신비에 싸인 인물은 더 그렇다. 그가 베트남의 국부며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100만 명이 넘게 죽은 베트남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수는 없다. 목적을 위해 수단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폭력 혁명이야말로 공산주의의 가장 큰 단점이다. 호치민을 '총을 든 간디'라고 말하지만 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호치민이 누구보다도 외교적 노력과 협상을 우선했고 호전주의자들과 대립했다고 하지만 최종 결정권자로서 그가 책임을 면하긴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그 이전에 프랑스와 미국 등 제국주의의 행태가 비판 받아 마땅하다.

<호치민 평전>은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호치민의 생애를 재구성해 놓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민족 독립 투쟁에 일생을 바친 한 위대한 인간의 여정이 이 책 한 권에 담겨 있다. 이 책을 통해 근대 베트남 역사와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호치민이라는 인물을 보면서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런 지도자 한 사람 쯤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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