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방을 얻다 / 나희덕

샌. 2012. 1. 25. 09:44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들어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깃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 계신 저녁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 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까.

빈방을 마음으로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걸.

 

     - 방을 얻다 / 나희덕

 

나도 조용한 방이 필요하다. 산골의 작은 시골집이면 더욱 좋겠다. 지금 이리저리 알아보는 중이다. 그러나 매매가 아니라 전세로 구하려니 쉽지 않다. 따뜻해지면 시인처럼 발품이라도 팔아야겠다. 이 집에서 한 삼 년 정도는 살아보려 했는데 주변 여건이 자꾸 등을 떠민다. 도리어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디 있을까, 내따스한 거기는. 좋은 인연이 남몰래 미소 지으며 찾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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