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숨막히는 열차 속 / 신경림

샌. 2012. 1. 15. 08:08

낯익은 사람들이 한둘씩 내린다

어떤 사람은 일어나지 않겠다 버둥대다가

우악스런 손에 끌려 내려가고

어떤 사람은 웃음을 머금어

제법 여유가 만만하다

반쯤 몸을 밖으로 내놓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바깥은 새까맣게 얼어붙은 어둠

열차는 그 속을 붕붕 떠서 달리고

나도 반쯤은 몸을 밖으로 내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

땀내 비린내로 숨막히는 열차 속

새 얼굴들과 낯을 익히며 시시덕거리지만

내가 내릴 정거장이 멀지 않음을 잊고서

 

     - 숨막히는 열차 속 / 신경림

 

몇 년 전 직장 건강 검진에서 심전도 검사를 받았는데 이상 소견이 나왔다. 재검사를 받으라는 통보가 왔지만 무시했다. 요사이 겨울 찬 바람 속을걸을 때면 가슴에 통증이 올 때가 있다. 정말 심장 혈관에 이상이 있는지 모르겠다. 심장 쪽 질병은 대개 급사로 이어진다. 걱정하는 아내에게는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말했다. 긴 병으로 고통을 당하며 추한 꼴 보이며 사느니 차라리 한순간에 가는 게 낫다. 가장 깔끔하다. 이젠 자식도 모두 출가시켰고, 떠난 뒤 가족 생계도 걱정할 게 없다. 아쉬움이 없을 순 없겠으나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낯익은 사람이 한둘씩 이승의 열차에서 내리는 걸 본다. 바깥 새까만 어둠이 두려울 것도 같지만 숨막히는 열차 속에서 벗어가는 해방감이 시원할 것도 같다. 분명한 건 내가 내릴 정거장도 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곳이 어디든 그때가 되면 여유 있게 웃음을 머금으며 - 동시에 조금은 쓸쓸하고 설레면서 - 객창 안의 사람들에게 바이바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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