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황홀한 국수 / 고영민

샌. 2011. 12. 23. 08:35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렇게 말아

그릇에 얌전하게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에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 황홀한 국수 / 고영민

 

시장 한구석, 허름한 국숫집을 찾아 한 끼를 때우는 고단한 사람의 굽은 등이 보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빈 그릇을 내려놓는다. 어떤 산해진미보다 더황홀한 식사다. 먹는다는 것의 원초적 의미는 바로 이런 건강함이 아닐까. 주기도문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의 의미도 이와 같을 것이다.이 시를 읽으며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그림이 떠올랐다. 부자들의 식탁에는 없는 그 무엇, 온전한 밥상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 앉은 일일 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 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 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앞에 드넓다

 

     -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 사발을 들어올릴 때 / 고정희

 

 

바람 몹시 찬 밤에

포장마차 국수집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예닐곱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한 그릇 국수를 내왔는데

넘칠 듯 수북하다

 

아이가 배불리 먹고 젓가락을 놓자 남자는

허겁지겁 남은 면발과 주인이 덤으로 얹어준 국수까지

국물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먹는다

 

기왕 선심 쓸 일이면

두 그릇을 내놓지 왜 한 그릇이냐 묻자 주인은,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그릇 값 내고 한 그릇은

얻어먹는 것이 되니 그럴 수야 없지 않느냐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포장마차 주인의 셈법이 좋아

나는 한참이나 푸른 달을 보며 웃는다

바람은 몹시 차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

 

     - 포장마차 국수집 주인의 셈법 / 배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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