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혜화경찰서에서 / 송경동

샌. 2011. 12. 16. 10:58

영장 기각되고 재조사 받으려 가니2008년 5월부터 2009년 3월까지핸드폰 통화내역을 모두 뽑아왔다난 단지 야간 일반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혀왔을 뿐인데힐금 보니 통화시간과 장소까지 친절하게 나와 있다청계천 탐엔탐스 부근....

 

다음엔 문자메씨지 내용을 가져온다고 한다함께 잡힌 촛불시민은 가택수사 했고통장 압수수색도 했단다 그리곤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며웃는 낯으로 알아서 불어라 한다무엇을, 나는 불까

 

풍선이나 불었으면 좋겠다풀피리나 불었으면 좋겠다하품이나 늘어지게 불었으면 좋겠다트럼펫이나 아코디온도 좋겠지일년치 통화기록 정도로내 머리를 재단해보겠다고몇년치 이메일 기록 정도로나를 평가해보겠다고너무하다고 했다

 

내 과거를 캐려면최소한 저 사막 모래산맥에 새겨진 호모싸피엔스의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와야지저 바닷가 퇴적층 몇천 미터는 채증해놓고 얘기해야지저 새들의 울음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얘기해야지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야지,이게 뭐냐고

 

- 혜화경찰서에서 / 송경동

 

 

희망버스를 주도한 혐의로구속되었던 송경동 시인이 어제 기소되었다. 죄목은 특수공무집행방해,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공동 건조물 침입 등 5가지다. 시인은 지난달에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다. 감옥에 갇힌 시인 대신 아내가 수상 소감을 읽었다.

 

'다섯 달 수배생활을 마치고 자진해 들어 온 부산서부경찰서 유치장. 첫날, 관식이 너무 맛있어 진짜 이번엔 사는가 보구나 했습니다. 그간 기륭전자, 용산참사 사건 등으로 세 번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와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이번엔 꼭 몇 개월이라도 살다 나가겠습니다. 근 몇 년 넋이 빠져 살았습니다.

 

어느 땐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구부러진 평택 대추리 어르신들 곁이었고, 잠깐 눈을 감았다 떴더니 67일째, 94일째 굶고 있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곁이었고, 잠깐 다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용산4가 다섯 분의 시신 곁이었고, 잠깐 다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이번엔 내가 기륭전자공장 앞 포클레인 붐대 위에서 죽겠다고 매달려 있었습니다. 잠깐 다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내가 폭우를 맞으며 목발을 짚고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잠깐 다시 눈을 감았다 뜨고 나면, 조금은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전한, 사람들의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제가 무슨 고민이 깊어 그랬을 거라고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다만 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탁발한 시인의 길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한편, 가끔 시인들은 넋이 좀 빠져 저 세상으로도, 이 세상으로도 좀 왔다 갔다 해야 제 맛인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하튼, 거의 사회적으로 시인의 탈을 쓴 '전문시위꾼'으로 낙인찍히던 때 구사일생으로 창비와 신동엽 선생님께서 저를 다시 시인으로 호명해 주셨습니다. 오전엔 체포영장 발부 소식을, 그리고 오후엔 수상 소식을 듣게 되는 기가 막힌 날. 오전 체포영장 소식도 덩달아 무슨 큰 상 소식처럼 들리던 날, 오후 수상 소식이 오히려 엄중한 탄압으로 느껴지기도 하던 날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살고, 쓰겠습니다.

 

신동엽 선생님의 시 '종로5가'에 나오는 칠흑 같은 밤, 맨발로 빗속에서 고구마 한 자루를 메고 낯선 주소를 묻는 시골아이처럼, 장총을 곁에 세워두고 어느 바위 곁에 누워 곤히 잠든 한 동학농민군처럼 그렇게, 조금은 높고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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