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17)

샌. 2012. 1. 14. 07:53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J가 세상을 떴다. 10년 넘게 병마에 시달리다가 안식에 들었다. 상태가 많이 나빠졌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으나 한 번 찾아가 보지를 못했다. 부고를 접하니 그게 제일 미안하다.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게 재작년 어느 결혼식장에서였다. J는 성치 않은 몸으로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지방에서 올라왔었다. 피로연에서 옆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때도 부인이 도와주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잘 안 되었다.

J는 키가 작지만 당찬 성격이라 동기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J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지금도 말한다. 산골 집에서 중학교까지 10km를 3년 내내 걸어 다니면서도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과외 한 번 받은 적 없었다. 집이 가난해서 방학 때는 아이스케키 장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외모나 환경의 콤플렉스로 주눅이 들거나 좌절했을 법도 하건만 J는 의지력으로 이겨냈다. 정말 대단한 친구였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못 싸와 일부러 운동장으로 피했고, 가끔은 내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배고픔을 면했다고 자주 고마워했다.

중학교에서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한 친구가 네 명이었는데 서로 가깝게 지냈다. 경상도 촌구석에서 생면부지의 한양으로 올라왔으니 고향 친구밖에 서로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래도 J는 성격 탓인지 서울 생활에 빨리 적응했고 새 친구들도 잘 사귀었다. 교유의 폭이 우리보다는 훨씬 넓었다. 키는 작았지만 아무도 무시하지 못했다. 자연히 우리 모임도 늘 J가 주도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서로 가는 길이 달아선지 만나는 게 뜸해졌다. 직장 따라 대전으로 내려간 뒤에는 더욱 그랬다.

J와 나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바로 J의 소개로 아내를 만났기 때문이다. 장가를 못 가고 있는 게 불쌍해 보였는지 자기 직장 동료의 여동생과 연결을 시켜 주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짝이 맺어졌다. 만약 J가 아니었다면 나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중매쟁이에게는 잘해 줘야 한다는데 술 한 번 사준 것 말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가 먼저 가고 나니 여러 가지가 아쉽고 미안하다. 아프기 전에 서울로 출장 온 그를 집 근방에서 만나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는 그냥 여관으로 보내기도 했다. 집에 초대해 재우고 따뜻한 아침밥이라도 같이 했어야 옳았다.

같은 중고등학교에 다닌 네 명의 친구 중 벌써 둘이 저세상으로 갔다. 한 친구가 5년 전에 갑자기 이승을 떠나더니 올해는 J가 뒤따랐다. 이제 둘이 남았는데 우리의 순서도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나고 죽는 것이 목숨붙이의 숙명이라지만 산다는 게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천 년 만 년 살 것 같지만 하늘이 부르면 모든 것 훌훌 털고 떠나야 한다. 죽음이라는 단 일회적 경험, 그 앞에서 모든 인간은 무력하다. 죽음 앞에서 인간 존재의 연약함을 절절히 체험한다. 그러나 죽음 역시 인간사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기 나름일 것이다. 저 너머의 세계에 어떤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서는 소멸이지만 저쪽에서는 새로운 탄생의 팡파르가 울리지나 아닐까.

이 사진은 고등학교 졸업식 날 촌놈들끼리 찍은 것이다. 1971년 겨울이니 벌써 41년 전의 옛날이다. 그날 뿔뿔이 흩어지는 우리를 불러모아 이렇게 기념사진을 남긴 것도 친구 때문이었다. 생의 마지막까지 열정적으로 산 친구였는데 이제는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인생을 산 친구, 그는 작은 거인이었다. 친구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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