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장기 비상시대

샌. 2012. 1. 2. 11:42

쿤슬러(J. H. Kunstler)가 쓴 <장기 비상시대(The Long Emergency)>는 석유 없는 미래를 다룬 충격적인 책이다. 부제가 '석유 없는 세상, 그리고 우리 세대에 닥칠 여러 위기들'이다. '장기 비상시대'는 석유로 대표되는 화석연료가 고갈된 에너지 위기 상황의 시대를 말한다. 그때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제적, 정치적 혼란과 고통이 찾아올 것이다. 인류는 지금 불타는 집을 나서 몽유병 환자처럼 벼랑 끝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고 미래가 묵시론적 종말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는 인구나 기대수명, 생활 수준, 지식과 기술, 품위 등의 측면에서 엄청난 상실을 겪게 되겠지만, 결국은 어둠의 통로를 지나고 살아남으리라 예상된다. 저자는 석유 시대 이후의 '장기 비상시대'가 지역농업 중심 시대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값싼 석유에 의존하는 세계화 경제는 몰락할 것이고, 월마트나 대형 주택, 지금의 학교 시스템도 붕괴할 것이다. 이 책은 석유가 고갈되고 경제 붕괴가 일어난 세계의 모습을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다. 석유 없는 삶을 상상조차 못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화석연료로 인한 풍요는 인류에게 딱 한 번 주어진 사건일 뿐이지 결코 지속 가능한 일일 수는 없다. 석유 생산의 정점은 이미 지났고,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도 적당한 게 없다. 천연가스, 수소, 석탄, 수력, 태양광, 풍력, 합성 석유, 바이오매스, 메탄하이드레이트 등 어느 것도 석유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저자는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조목조목 반박한다. 대체 연료의 대부분이 석유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석유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예를 들면 태양광이나 풍력은 석유에너지 없이는 기기를 만들 수 없다. 원자력은 전기에너지의 일부를 보충해 주겠지만 그것 역시 자원의 한계가 있다. 그리고 장기간 자연생태계에 미치는 악영향이 너무 크다.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가 없는 이상 석유 이후의 '장기 비상시대'는 고통스럽게 다가올 것이라고 쿤슬러는 지적한다.

화석연료의 감소는 자원전쟁을 일으키고 석유에 기반을 둔 농업의 붕괴와 함께 식량전쟁도 유발할 것이다. 그때는 기후변화와도 겹쳐 인류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굶주림과 기아, 빈부격차가 나타난다. 그리고 화석연료의 남용과 자연의 과잉 개발의 후유증으로 동식물이 대량으로 멸종되고 전염병이 창궐한다. 즉, 자연의 복수다. 산업시대의 문명은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 목적을 위해 과학의 모든 힘을 바쳐왔다. 그러나 석유가 없어지면 더는 지금과 같은 파괴적 성장경제는 지속하지 못 할 것이다. 세계화, FTA도 마찬가지다. 월가로 대표되는 카지노금융 자본주의 체제도 당연히 몰락할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은 자동차 시대의 종말로 대도시 교외지역은 슬럼화될 것이고, 대도시 고층빌딩도 비슷한 비극적 운명에 처할 것이다.

쿤슬러가 그리는 '장기 비상시대'의 전망은 암울하다. '장기 비상시대'는 포만감 대신 배고픔이, 따뜻함 대신 추위가, 여가 대신 고역이, 건강 대신 아픔이, 평화 대신 폭력이 주를 이루는 시대다. 그 시대는 사회계층 간의 격차가 더 커지므로 사회적 평등에 대한 기대는 접는 게 좋다. 잘못되면 신봉건주의의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정치적 불안정, 무정부 상태와 함께 민중폭동과 혁명이 연발할 수도 있다. 비극적이게도 현대의 여성주의 혁명의 결과물은 상당수 무효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장기 비상시대'는 인류에게 엄청난 트라우마가 될 것이고, 또 다른 대량학살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쿤슬러는 인류가 석유 없는 시대의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스템의 사회를 만들어낼 것으로 전망한다. 앞으로 일어날 변화는 생활이 갈수록 지역화되고 규모는 축소된다. 장거리 수송에 의존하여 멀리서 자원을 조달해오는 복잡한 시스템은 유지될 수 없다. 그리고 농업이 중심이 된다. 하이테크나 정보, 서비스, 관광, 금융 산업 등 식량 생산 이외에는 모든 활동이 부차적이 된다. 이 시대의 농업은 공장식 산업농이 아니라 소규모 지역중심 자급 농업이다. 그에 따라 '농경 중심 지역타운'으로 다시 복귀할 가능성이 크다. 사회의 중심이 타운이나 작은 도시로, 그리고 그런 곳을 뒷받침해주는 주변 농경지대로 돌아간다. 긍정적 측면은 공동체적인 친밀한 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 친근하게 어울려 일하게 된다. '장기 비상시대'에 우리가 누릴 생활 수준은 18세기 때와 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정도일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류 역사를 볼 때 위기는 늘 새로운 기회였다. 쿤슬러의 견해는 종말론적인 비관론과 터무니없는 낙관론 사이에 있다. 풍요의 시대는 끝이 나겠지만 새로운 시스템의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다. 주변에 농경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소도시 중심의 주거 형태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과 같은 파괴와 약탈에서 상부상조와 배려, 절약의 문화로 변한다는 얘기다. 세상은 다시 넓어진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문명과 과학기술의 이 시대는 인류 역사상 특이했던 한 시기에 불과했다. 새로운 지구는더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곳이 될 거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유럽의 선진국들은 이미 석유 이후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토건국가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토를 계속 난도질하고 있다. 지도층이나 일반 국민들이나 '장기 비상시대'에 대한 비전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다. 농업을 경시할 때 '장기 비상시대'에는 더욱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석유가 고갈된 뒤 인류의 역사는 어느 길로 진행될까? 이 문명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가장 가능성이 작지만 혁명적인 신에너지 기술이 개발되어 풍요를 계속 누릴 수도 있다. 과학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허황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많다. 책을 읽어 보면 역시 저자가 전망하는 시나리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인류는 값싼 석유를 남용한 산업문명이라는 잘못된 풍요의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그러나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인류는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회복하여 더욱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류는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파멸할 수도 있다. 가장 비극적인 시나리오다. 이에 대해 저자는 조금은 낭만적인 투로 이렇게 말한다.

'인류가 만일 그런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게 될 경우, 그래도 우리가 한때 여기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다. 옛날 옛적에 우리가 이 놀라운 푸른 별에 많이 모여 살았다는 점도, 그 별에 관한 모든 것과 거기서 우리와 함께 살았던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지적으로 경탄할 줄 알았다는 점도, 그 별의 아름다움을 음악과 미술과 건축과 문학과 무용으로 찬미할 줄 알았다는 점도, 우리의 능력과 염원이 거의 신적인 수준에 도달한 때가 있었다는 점도 변함없을 것이다. 우리는 깊이를 모를 신비에서 나와 그 신비 속으로 돌아갈 것이며, 결국 남는 것은 신비뿐일 터이다.'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리학의 최전선  (0) 2012.01.16
인간과 사물의 기원  (0) 2012.01.09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  (0) 2011.12.19
물방울의 마술  (2) 2011.12.15
위대한 패배자  (0) 2011.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