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영혼의 식사

샌. 2011. 10. 8. 08:29

<인생>, <허삼관 매혈기>로 만난 위화(余華)는 인생의 고통과 비극을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묘사해 인상적이었다. 위화는 색깔이 분명한 매력적인 작가다. 문학의 위대한 점은 인간을 바라보는 동정과 연민의 마음에 있고, 이런 느낌을 철저하게 표출해내는데 있다고 했다. 위화는 인간의 내면을 따스한 시선으로 깊이 들여다볼 줄 안다.

<영혼의 식사>는 위화의 산문집이다. 아들을 키우며 느낀 단상, 유년시절의 추억, 그리고 글쓰기와 자신이 쓴 책에 대한 생각을 모았다. 소설과는 다른 위화의 실제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위화의 색깔은 여기서도 온전히 드러난다. 작가가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 쓴 수필 중에서 두 편을 골라 보았다. 슬며시 미소가 떠오르게 되는 글이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좋은 글은 글재주보다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음을 다시 확인한다.

아기 제비 한 마리에 바흐는 물러나고

아들이 태어나고 반년쯤 흐르고 나자 벌써부터 내 눈에는 녀석이 온전한 사람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녀석은 아직 먹고 자고, 울고 웃는 것 이외에 별다른 표현이 없었지만, 난 아내 천홍에게 이젠 우리 아이에게도 분명히 취미가 있어야겠다고 말하고는 아들에게 고전음악을 좋아하는 내 취미를 나누어주기로 했다. 바흐와 브람스, 그리고 드보르자크와 메시앙은 물론 브루크너와 쇼스타코비치를 말이다. 나는 그들이 내 아들에게도 행복을 전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일 내게 즐거움을 전해주니까 말이다. 그리고 로우로우도 나를 닮아 분명히 즐거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음반들 가운데 아들을 위해 우선 바흐의 <평균율>과 드보르자크의 <작은 우주>, 드뷔시의 <아이들의 낙원>을 골랐다. 세 편 모두 피아노곡이었다. 나는 순수한 진행, 편견이 개입되지 않는 진행 속에서 소리 자체의 욕망을 표현할 뿐인 피아노의 진행을 좋아한다. 현악 작품은 그것이 전하는 정서적 편향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 교향악을, 특히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이나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교향악을 들으면 틀림없이 경기를 일으킬 것이다. 녀석의 작디작은 마음으로는 그 풍부하고도 광활한 소리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바흐의 <마태 수난곡> 같은 작품 말이다. 나는 그 진행상의 단순함과 조용함에 깊이 감동하지만, 음악적 진행 뒤에 전해오는 그 거대한 고난에 숨이 막히기도 한다. 나는 생후 6개월이 갓 지난 아들에게 벌써부터 우울함을 맛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후 6개월이 지나자 아들 녀석의 성격이 형성되는 속도가 몸이 커가는 속도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우는 것도 이제는 녀석의 무기일 뿐만 아니라 영광 그 자체가 되기도 했다. 녀석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느낄 때 늘 상당히 초조한 빛을 보이곤 했는데, 특히 녀석이 미간을 찌푸린 채 주위의 사물을 관찰하는 모습은 마치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해서 나는 녀석에게 생각할 시간을 좀 더 많이 줘야 했다.

이게 바로 내가 <평균율>과 <작은 우주>, 그리고 <아이들의 낙원>을 선택한 이유다. 난 녀석이 진정한 평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고, 이것들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듣지 않길 바랐다. 내 생각에는 <평균율>과 <작은 우주>가 단순성의 최고미학을 드러내고 있고, <낙원의 아이들>은 드뷔시가 자신의 딸을 위해 썼기 때문인지 경쾌하면서도 천진하고, 유머와 따듯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같은 음반에는 풀랑크의 <서양 인형>도 있다.

매일 밤 내가 녀석을 안아 침대에 눕히고 나면 이들 피아노곡이 흐르기 시작하고, 선율이 진행됨에 따라 녀석은 점차 잠 속으로 빠져든다. 이렇게 매일매일 녀석은 피아노곡 속에서 잠들었고, 다음 날 피아노곡을 들으면서 깨어났다. 녀석은 아주 천천히 기기 시작했고, 걷기 시작했고, 옹알이를 지나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흐에 대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음악을 들으며 머리를 흔들다가 몸을 흔들기도 하고, 흥분이 극에 달하면 스피커 앞으로 기어가서는 안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대고 악악대기까지 했다.

바흐에 대한 녀석의 사랑이 점점 나와 같아진다는 낙관 속에서 지내던 어느 날, 녀석의 외할머니가 동요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가져오셨다. 그 테이프에는 40년도 훨씬 넘은, 저우슈웬(周旋)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동요가 들어 있었다.

“아기 제비 한 마리가 꽃으로 옷을 해 입고.....”

이날 오후, 녀석은 이 노래를 듣고는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고 말았다. 입을 떡하니 벌리고 웃으며 작은 몸을 힘차게 흔들어대더니 반복해서 틀어달라고 졸라댔다. 녀석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헐떡이면서 온 힘을 다 쏟아낸 후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고 나서야 나는 오디오 시스템을 끌 수 있었다.

이날 이후 녀석은 다시는 바흐를 듣지 않았다. 내가 녀석을 위해 바흐의 <평균율>을 틀 때마다 일 년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들 녀석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손을 휘저으며 정확치 않은 발음으로 “아기 제비, 아기 제비....”를 옹알거렸다. 난 바흐와 드보르자크를 끌 수밖에 없었고, ‘아기 제비’는 온 방 안을 날아다녔다.

일 년여 동안 진행된 나의 고심에 찬 바흐 프로젝트는 단 몇 분 만에 ‘아기 제비’ 한 마리 앞에 처참하게 무너져 버렸다. 그리하여 나의 장시간에 걸친 음모와 아들 녀석이 교양이 넘치는 인간으로 자라길 바랐던 내 꿈은 마치 벼가 늦게 자란다고 키를 키우기 위해 뽑아버린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진정한 평온 어쩌고 하는 것들은 아들 녀석이 분노에 찬 표정으로 내젓는 두 손과 발음도 명확치 않은 ‘아기 제비’ 한 마리 앞에서 순식간에 박살이 나 버렸다. 그렇게 대중음악은 아들 녀석을 통해 내게 그 위력을 입증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아들 녀석이 처음으로 바흐를 들었을 때 손을 흔들어댄 것은 아마도 <평균율>을 대중음악으로 여겨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녀석은 마치 로큰롤을 듣는 것처럼 우리의 위대한 바흐를 들었던 것이다.

소비지향적인 아들 녀석

아들 녀석은 아직 세 살이 안 됐지만, 외출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우리 택시 잡자.”

이 말을 하는 녀석의 표정에는 외출하면 당연히 택시를 타야하고, 마치 택시가 세상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것처럼 여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대략 두 살 무렵, 녀석이 몇 마디 말을 할 줄 알게 되었을 때, 녀석이 우리에게 되뇌던 말이 기억난다.

“난 버스 안 탈래, 난 택시 탈래.”

녀석이 어떻게 버스와 택시를 구별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와 비교하면 그저 감탄사가 나올 뿐이다. 나는 스물대여섯 살 때 처음으로 택시라고 불리는 교통수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서른 살 때 처음으로 그걸 타본데다가 한동안 ‘잡는다’는 말이 입에 붙지 않아서 애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들 녀석에게 ‘택시 잡자’는 말은 외출을 의미하고, 거리에 나서는 걸 의미하고, 노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그냥 그런 말인 거다.

나는 아직도 이 소비지향적인 시대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중인데 녀석은 태어나자마자 이 시대의 아이로 자라났으니 녀석에 대한 내 훈계는 구태의연한 소리로 들릴 뿐이고, 매번 실패로 끝을 맺게 된다. 비록 녀석은 아직 세 살이 안 됐지만, 녀석에게 자기 아버지는 벌써 구시대의 퇴물인 거다.

요즘은 녀석이 이 말을 자주 한다.

“이건 못 본 건데.”

이 말은 그 물건을 갖고 싶다는 뜻이다. 무조건적인 소비만능의 어조로 녀석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없기 때문에 그것이 갖고 싶다는 것이다. 녀석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앞으로 녀석의 어조는 더욱 강고해질 것이기에 나는 불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왜냐하면 녀석은 내 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 소비만능인 시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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