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페이터의 산문(散文)

샌. 2004. 11. 24. 14:18

며칠 전, 일간지에 재미있는 광고가 실렸다.

ㅎ 정수기 회사에서 이양하 님의 '페이터의 산문'을 70년대 국어 교과서에 나온 그대로 전면 광고로 실은 것이다.

30여년 전에 공부했던 교과서를 다시 보게 되니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의 교실로 되돌아간 것 같다. 저 부분에 밑줄을 긋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새롭다.

그때에 나는 국어 과목을 제일 좋아했다. 국어 선생님은 작은 키에 목소리가 낭낭하셨는데 시를 낭송해 주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 그때는 국어 시간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모른다. 그 시간이면 선생님 따라서 환상의 나라로 여행을 하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랜드케년 기행기였다. 얼마나 실감나게 설명해 주시는지 나중에 그랜드케년은 꼭 가보리라고 다짐을 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 다녀온 사람에게는 꼭 그랜드케년에 대한 느낌을 묻곤 한다. 그런데 심드렁한 반응을 대하면 내 마음 속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 외에도 '낙엽을 태우며' '청춘 예찬' '금강산 기행기' 같은 명문들도 생각이 난다. 비록 시험 공부를 위해서 열심히 읽었을지라도 당시에 교과서를 통해서 접했던 글들이 내 정신의 자양분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페이터의 산문'도 그때 이후로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는 글이지만 긴 세월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친구처럼 정겹게 다가온다.

그런데 같은 글이라도 나이에 따라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글의 내용과 인생 경험이 공명을 일으킬 때 글로부터 참된 감동을 받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10대 때 느낀 그냥 좋은 글이라는 감상과, 서리가 머리를 덮은 나이의 지금 느낌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페이터의 산문'은 특히 그러한 글이다. 10대보다는 어느 정도 인생의 연륜이 쌓인 40대, 50대에 더 잘 어울리는 글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니 글 내용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하게 되면서, 또 내 파릇파릇했던 옛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추억의 글이다.

글의 일부분을 옮겨 본다.


사람의 칭찬 받기를 원하거든, 깊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 그들이 어떠한 판관(判官)인가, 또 그들이 그들 자신에 관한 일에 대하여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가를 보라. 사후(死後)에 칭찬받기를 바라거든, 후세(後世)에 나서 너의 위대한 명성(名聲)을 전한 사람들도, 오늘같이 살기에 곤란을 느끼는 너와 다름없다는 것을 생각하라. 진실로 사후의 명성에 연연(戀戀)해 하는 자는, 그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의 하나하나가, 얼마 아니하여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기억자체도 한동안 사람의 마음의 날개에 오르내리나, 결국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네가 장차 볼 길 없는 사람들의 칭찬에 그렇게 마음을 두는 것은 무슨 이유인고? 그것은 마치 너보다 앞서 이 세상에 났던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참다운 지혜(智慧)로 마음을 가다듬은 사람은, 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호머의 싯구 하나로도, 이 세상의 비애(悲哀)와 공포(恐怖)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 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잎, 잎, 조그만 잎. 너의 어린애도, 너의 아유자(阿諛者)도, 너의 원수도, 너를 저주(咀呪)하여 지옥에 떨어뜨리려 하는 자나, 이 세상에 있어 너를 헐고 비웃는 자나, 또는 사후에 큰 이름을 남길 자나, 모두가 다 한 가지로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그들은 참으로 호머가 말한 바와 같이 봄철을 타고난 것으로, 얼마 아니 하여서는 바람에 불리어 흩어지고, 나무에는 다시 새로운 잎이 돋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공통한 것이라고는 다만 그들의 목숨이 짧다는 것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마치 그들이 영원한 목숨을 가진 것처럼, 미워하고 사랑하려고 하느냐? 얼마 아니 하여서는 네 눈도 감겨지고, 네가 죽은 몸을 의탁(依託)하였던 자 또한 다른 사람의 짐이 되어 무덤에 가는 것이 아닌가? 때때로 현존(現存)하는 것, 또는 인제 막 나타나려 하는 모든 것이 어떻게 신속히 지나가는 것인가를 생각하여 보라. 그들의 실체(實體)는 끊임없는 물의 흐름, 영속(永續)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바닥 모를, 때의 심연(深淵)은 바로 네 곁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 때문에 혹은 기뻐하고, 혹은 서러워하고, 혹은 괴로워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무한한 물상(物象) 가운데 네가 향수(享受)한 부분이 어떻게 작고, 무한한 시간 가운데 네게 허여(許與)된 시간이 어떻게 짧고, 운명 앞에 네 존재가 어떻게 미소(微小)한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기꺼이 운명의 직녀(織女) 클로토의 베틀에 몸을 맡기고, 여신(女神)이 너를 실삼아 어떤 베를 짜든 마음을 쓰지 말라.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싸움에 휩쓸려 들어갔을 때에는, 때때로 그들의 분노와 격렬한 패기(覇氣)로 오늘까지 알려진 사람들 - 저 유명한 격노(激怒)와 그 동기(動機)를 생각하고, 고래(古來)의 큰 싸움의 성패(成敗)를 생각하라. 그들은 지금 모두 어떻게 되었으며, 그들의 전진(戰塵)의 자취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먼지요, 재요, 이야기요, 신화(神話), 아니 어떡하면 그만도 못한 것이다. 일어나는 이런 일 저런 일을 중대시(重大視)하여, 혹은 몹시 다투고 혹은 몹시 화를 내던 네 신변(身邊)의 사람들을 상기(想起)하여 보라. 그들은 과연 어디 있는가? 너는 이들과 같아지기를 원하는가?


죽음을 염두(念頭)에 두고, 네 육신(肉身)과 영혼을 생각해 보라. 네 육신이 차지한 것은 만상(萬象) 가운데 한 미진(微塵), 네 영혼이 차지한 것은 세상에 충만(充滿)한 마음의 한 조각. 이 몸을 둘러보고, 그것이 어떤 것이며, 노령(老齡)과 애욕(愛慾)과 병약(病弱) 끝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또는, 그 본질(本質), 원형(原形)에 상도(想到)하여 가상(假象)에서 분리된 정체(正體)를 살펴보고, 만상의 본질이 그의 특수한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제한된 시간을 생각해 보라. 아니, 부패(腐敗)란, 만상의 원리 원칙에도 적용하는 것으로, 만상은 곧 진애(塵埃)요, 수액(水液)이요, 악취(惡臭)요, 골편(骨片). 너의 대리석은 흙의 경결(硬結), 너의 금은(金銀)은 흙의 잔사(殘渣)에 지나지 못하고, 너의 명주 옷은 벌레의 잠자리, 너의 자포(紫袍)는 깨끗지 못한 물고기 피에 지나지 못한다. 아! 이러한 물건에서 나와 다시 이러한 물건으로 돌아가는 네 생명의 호흡(呼吸) 또한 이와 다름이 없느니라.

천지(天地)에 미만(彌漫)해 있는 근 영(靈)은 만상을 초와 같이 손에 넣고, 분주히 차례차례로 짐승을 빚어 내고, 초목을 빚어 내고 어린애를 빚어 낸다. 그리고 사멸(死滅)하는 것도 자연의 질서에서 아주 벗어져 나가는 것은 아니요, 그 안에 남아 있어 역시 변화를 계속하고, 자연을 구성하고, 또 너를 구성하는 요소로 다시 배분(配分)되는 것이다. 자연은 말없이 변화한다. 느티나무 궤짝은 목수가 꾸며 놓을 때 아무런 불평도 없었던 것과 같이, 부서질 때도 아무런 불평을 말하지 아니 한다. 사람이 있어, 네가 내일, 길어도 모레는 죽으리라고 명언(明言)한다 할지라도, 네게는 내일 죽으나 모레 죽으나 별로 다름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너는 내일 죽지 아니하고, 일 년 후, 이 년 후, 또는 십 년 후에 죽는 것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도록 힘써라.


만일 너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네 마음이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이니까, 너는 그것을 쉬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만일 죽음에 부수(附隨)되는 여러 가지 외관(外觀)과 관념(觀念)을 사리하고, 죽음 자체를 직시(直視)한다면, 죽음이란 자연의 한 이법(理法)에 지나지 아니하고, 사람은 그 이법 앞에 겁을 집어먹는 어린애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알 것이다. 아니, 죽음은 자연의 이법이요 작용일 뿐 아니라, 자연을 돕고 이롭게 하는 것이다.

철인(哲人)이나 법학자(法學者)나 장군(將軍)이 우러러보이면, 이러한 사람으로 이미 죽은 사람을 생각하라. 네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볼 때에는 네 조상 중의 한 사람, 옛날의 로마 황제의 한 사람을 생각하여 보라. 그러면, 너는 도처(到處)에 네 현신(現身)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것을 생각하여 보라. -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가? 대체 어디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네 자신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너는 네 생명이 속절없고 너의 직무, 너의 경영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머물러 있으라. 적어도, 치열한 불길이 그 가운데 던져지는 모든 것을 열과 빛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같이, 이러한 세상의 속사(俗事)나마 그것을 네 본성(本性)에 맞도록 동화(同化)시키기까지는.


세상은 한 큰 도시(都市), 너는 이 도시의 한 시민(市民)으로 이 때까지 살아왔다. 아, 온 날을 세지 말며, 그 날의 짧음을 한탄(恨歎)하지 말라. 너를 여기서 내보내는 것은, 부정(不正)한 판관이나 폭군(暴君)이 아니요, 너를 여기 데려온 자연(自然)이다. 그러니 가라. 배우가, 그를 고용한 감독(監督)이 명령하는 대로 무대에서 나가듯이, 아직 5막을 다 끝내지 못하였다고 하려느냐?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는 3막으로 극 전체가 끝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작자(作者)의 상관할 일이요,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기쁨을 가지고 물러가라. 너를 물러가게 하는 것도 혹은 선의(善意)에서 나오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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