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라마크리슈나 어록

샌. 2004. 11. 4. 14:26

갈등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분열과 투쟁을 일으키는 파괴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다.

지금 시대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갈등이 표출되면서 몹시 불안정하다.

이때는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기보다는 같음을 찾아서 인정하고 공존하는 방향으로 상호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데올로기나 이념이 생명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대 입장에 서있는 상대방은 나를 비쳐보는 거울이 될 수 있다.

특히 종교의 세계에서 그럴 필요를 더욱 느낀다.

보편적 종교의 지혜는 시간, 장소, 교리의 차이를 떠나 인간 영혼에 공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손을 맞잡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나만의 진리 독점주의는 우리 모두를 파멸시킨다. 대신에 열린 종교적 심성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포용한다.

힌두교의 라마크리슈나도 그런 통합형 현자에 속하는데, 기독교도나 불교도나 그의 말에서 자신의 종교에 맞는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은 쉽고 아름다운 비유로 되어있다.

라마크리슈나 역시 다른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병폐를 영성의 부족으로 진단한다. 개인이 내면에 들어있는 신성을 깨닫게 될 때만 사회가 발전할 수 있고, 인간 관계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각자의 마을에서 샘물을 마시지만 그 샘물의 연원은 땅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흐르는 보이지 않는 지하수의 흐름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라마크리슈나의 말을 발췌해 보았다.

램프가 석유 없이 불을 피울 수 없는 것처럼, 인간도 신 없이는 살 수 없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

파리는 팔려고 진열해 놓은 과자에 수시로 앉는다. 그러나 청소부가 쓰레기통을 들고 지나가면 쓰레기를 찾아 과자를 떠난다. 꿀벌은 꽃이 아닌 더러운 곳에는 절대로 앉는 법이 없다. 속물은 파리와 같다. 그들도 신이 내린 달콤한 것을 맛보지만, 더러운 것을 좇는 그들의 타고난 성향이 그들을 세상의 쓰레기 속으로 돌아가게 한다. 선한 사람은 신이 내린 아름다움을 명상하는 일에 늘 몰두한다.

배가 물에 머물러야지 물이 배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렇듯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이 세상에 살 수는 있지만 이 세상이 그의 안에 살아서는 안 된다.

캘커타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을에서 캘커타를 향해 출발했다. 그는 길에서 만난 사람에 물었다.
"캘커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어디입니까?"
"이 길로 가시오."
잠시 후 그는 다른 사람을 만나 그에게 물었다.
"이 길이 캘커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까?"
"아, 아닙니다.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왼쪽 길로 가세요."
그는 그렇게 했다. 그 길을 조금 걸어가다가 세 번째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캘커타로 가는 전혀 다른 지름길을 가르쳐주었다. 그 여행자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이 길에서 저 길로 바꾸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그는 첫 번째 길을 묵묵히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신을 발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한 길을 따라야만 한다.

태양은 온 누리에 빛을 비출 수 있지만 구름이 끼면 태양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우리의 영혼에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는 한, 신은 우리의 가슴속에 빛을 내릴 수 없다.

마늘즙을 담았던 컵은 아무리 깨끗하게 닦고 수백 번을 문질러도 마늘 냄새를 그대로 간직한다. 그렇듯 아집의 냄새도 절대로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물에 막대기를 꽂으면 물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의 물일 뿐이다. 그 물은 막대기 때문에 둘로 보인다. '나'라는 것은 그 막대기이다. 막대기를 제거하면 그곳에는 전처럼 오직 하나의 물뿐이다.

열매가 주렁주렁 맺힌 나무는 낮게 드리워진다. 그렇듯 당신도 위대하기를 원한다면 겸손해져라.

신하의 집을 방문하려는 왕이 그 신하가 자신을 적절히 맞이할 수 있도록 접대에 필요한 의자와 장식품, 음식 등을 창고에서 내주는 것처럼 신도 스스로 내려오기 전에 우리들의 가슴에 사랑과 정의, 신앙심과 동경을 보낸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지 않는 한, 당신은 광명을 받지 못할 것이다. 모든 세속적인 지식을 잊어버리고 어린이만큼 무지한 상태로 돌아가라. 그러면 당신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어린 원숭이는 어미를 꼭 껴안고 몸을 밀착시킬 수 있다. 하지만 새끼 고양이는 어미를 껴안을 수 없다. 그래서 새끼 고양이는 어미 곁에 갈 때마다 야옹, 야옹 구슬프게 운다. 만약 새끼 원숭이가 팔을 놓아버리면 그놈은 떨어져 다치게 될 것이다.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어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끼 고양이에게는 그런 위험이 없다. 어미가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신의 의지에 귀의하는 것과 독립독행의 차이는 바로 이것과 같다.

진정 이해했음을 보여주는 것은 침묵이다.

아직 그 꽃의 꿀을 맛보지 못한 동안 꿀벌은 윙윙 소리를 내면서 꽃 주변을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그러나 꽃잎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조용히 꿀을 마신다. 사람도 원칙이나 주의를 놓고 다투는 한 진정한 신앙의 꿀을 맛보지 못한다. 그것을 맛보기만 하면 그 사람은 침묵에 빠지고 만다.

바람은 오물 냄새만 아니라 백단향 나무의 냄새도 싣고 있지만 그것을 섞어버리지는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살더라도 이 세상과 섞이지는 않는다.

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이론적으로 신을 잘 아는 사람이 함께 숲을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먼 곳에서 호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신을 잘 아는 사람이 말했다.
"도망갈 필요 없어. 신이 우리를 보호해 줄 거야."
그러자 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 이 친구야. 도망가게나.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로 왜 신을 괴롭혀야 해?"

신은 도둑에게 물건을 훔치라고 말한다. 그와 동시에 집주인에게는 도둑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도레미파솔라'라고 발음하기는 쉽다. 그러나 노래로 부르거나 악기로 연주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듯 종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장님 몇 명이 어쩌다 한 동물을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동물을 코끼리라고 일러주었다. 장님들은 코끼리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코끼리는 커다란 기둥 같다고 말했다. 그는 코끼리의 다리를 만졌던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은 귀를 잡아보고는 코끼리는 키질 할 때 쓰는 부채 같다고 말했다. 꼬리나 배를 만진 다른 사람은 또 다르게 말했다. 우직 신의 한 면모만 보아온 사람은 신을 바로 그 모습으로 국한시킨다. 그는 신이 그밖에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언젠가 친구 둘이 길을 걷다가 몇몇 사람들이 독경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다른 한 친구는 안쪽을 엿본 뒤 매춘굴로 가버렸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한 짓에 혐오감을 느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부끄러운 줄 좀 알아라! 친구는 지금 하리의 성스러운 말씀들을 듣고 있는데 나는 이런 곳에 와 있다니!"
그러나 독경을 듣고 있던 그의 친구 역시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바보스럽기 짝이 없는 녀석! 이런 허튼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니. 내 친구는 모처럼 재미있게 즐기고 있는데!"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 사자(使者)가 독경을 경청했던 친구를 지옥으로 끌고 갔다. 매춘굴에 갔던 친구는 천국으로 안내했다. 신은 인간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지, 무엇을 했고 어디서 살았느냐로 인간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서너 명의 남자들이 보트로 갠지스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들 중 학자인 한 사람은 자신의 박식함을 대단히 과시하고 있었다. 그는 위대한 책들, 이를테면 베다(힌두교 경전), 베단타(베다에 속해 있으며 우파니샤드라고도 한다)와 6파 철학에 관한 책들을 공부했노라고 떠벌렸던 것이다. 그는 함께 탄 승객에게 말했다.
"당신은 베단타를 압니까?"
"아니오, 선생님."
"그렇다면 지금까지 철학을 한 번도 읽지 않았단 말인가요?"
"예, 선생님."
학자는 이런 식으로 대화를 계속 이어갔지만 다른 승객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중 무시무시한 폭풍이 몰아쳐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먼저 질문을 받았던 그 승객이 학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수영하실 줄 압니까?"
"아니."
"저는 베다와 베단타는 모릅니다만, 수영을 할 줄 알지요."

호수에는 몇 개의 계단이 나 있다. 한 계단에서는 힌두교도들이 주전자에 호숫물을 담아놓고 그것을 jal이라 부른다. 다른 한 계단에서는 이슬람교도들이 가죽 주머니에 호숫물을 담아놓고 pani라고 부른다. 또 다른 계단에서는 기독교도들이 호숫물을 그릇에 담아놓고 water라고 부른다. 그 물이 jal이 아니고 pani라든가 water라고 고집할 수 있는가? 얼마나 웃기는 짓인가! 그것의 실체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하나이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실체를 찾고 있지 않는가. 오직 기후나 기질, 이름이 다른 것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길을 따르도록 해주자.

내 종교만 진실이고 다른 종교는 거짓이라는 태도는 좋지 않다. 올바른 태도는 이런 것이다. "나의 종교는 옳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이 옳은지 그른지,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나는 잘 모른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인간이란 신을 깨닫지 않고는 신의 진정한 본질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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