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우울에 대한 변명

샌. 2004. 8. 10. 17:59

“한낮의 우울‘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내용 중에서 우울증을 생물의 진화와 관련시켜 설명한 부분이 흥미가 있었다. 우울증이 진화의 단계에서 생식에 이롭게 작용한 메커니즘의 하나로 보는 특이한 관점이었다. 그렇다면 우울은 제거되어야 할 정신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종족 보존이나 개체의 생명 유지 측면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중증의 우울증은 사람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보통 멜랑콜리라고 부를 때 그 어감이 가지는 조금은 낭만적인 느낌처럼 우울은 도리어 인생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첫째, 우울증이 과거에 이루어졌던 유익한 기능의 잔재라는 해석이 있다. 즉 어떤 유형의 우울증은 원시적 계급 사회 형성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 한다. 집단 생활에서 우두머리는 도전자들에 맞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서열이 낮은 동물이 우두머리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해도 기가 꺾이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도전할 것이고 그러면 그 집단에는 평화가 사라지고 기능이 마비될 것이다. 반대로 우두머리에게 도전했다가 실패했을 때 꼬리를 내리고 우울증 상태로 움츠러든다면 우두머리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집단에서 쫒겨날 염려도 없어진다. 이런 식으로 적절한 우울증은 계급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 사회적 조화를 이루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울증이 재발하는 것은 한 번 싸웠다가 진 동물이 다시 싸움에 나서서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만드는 방어 장치일 수도 있다. 인간도 사회적 지위 향상을 노리는 경우를 포함해서 늘 타인들의 공격과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울증은 그런 비난을 받게 될 영역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내리는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울증의 불안이라는 요소는 집단으로부터 추방될 만큼의 거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공포일 수도 있다.


둘째, 현대의 삶이 이제까지 진화된 뇌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주기 때문에 우울증은 우리가 진화 상태와 맞지 않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결과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불안을 유발하는 요인들로 가득하다. 거기에는 전통 사회가 갖지 않았던 무수한 고난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에 대한 대처 전략을 배울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적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울증 발병률은 산업 사회에 들어서면서 높아졌고 특히 전환기 사회에서 가장 높다. 이런 스트레스의 일차적 원인은 정보가 부재한 가운데 선택해야 할 일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는 것이다. 불확실성의 복잡해진 사회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신 분열을 일으킨다. 선택 범위가 넓어지는 것은 편리하기보다는 현기증이 나는 일이다. 어디에 살고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사고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선택의 폭이 지나치게 넓은 사회는 집단적인 불안감을 낳게 되고 그런 이유로 산업화 사회에 우울증이 많아진다고 본다. 더구나 지금은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주위의 대부분의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다. 또 우리가 대처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스트레스도 많아져서 일하는 어머니와 자녀들과의 단절, 육체 활동이 결여된 직업, 인공 조명 아래서의 생활, 종교가 주는 위안의 상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정보들을 처리해야 하는 부담 등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의 뇌는 이 모든 것을 견뎌내고 처리할 수가 없음이 분명하다.


셋째, 우울증이 인간 사회에 유익한 기능을 하며 그래서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는 건 좋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벼운 우울증은 강한 자기 성찰을 하게 하고, 그 성찰을 토대로 자신의 성격에 더 잘 맞도록 삶을 바꾸는 현명한 결정들을 내리게 한다. 가벼운 우울증은 진짜 실수를 후회하게 만들고 다시는 그런 실수들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막아 준다. 우울증의 주요 기능 가운데 하나는 비생산적인 행동을 막아준다고 한다. 우울증은 우리의 자원이 잘못 투자되었으며 다른 투자처를 찾아야 한다는 사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바이올린 연주자로 성공하고 싶은 여성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회의적이었다. 그래도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고 치료도 효과가 없었으나 음악을 포기하고 자신이 재능을 가진 다른 분야에 몰두하면서 우울증이 저절로 가셨다고 한다. 이와 같이 우울증은 끔찍하긴 하지만 새로운 동기 부여를 하기도 한다. 좀 더 심각한 우울증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를 자극해 준다. 즉 우울증이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우울증에 걸리면 진짜로 무력해지며 이런 기능장애가 이타주의를 이끌어내는 장치로 기능한다고 한다. 또 우리에게 우울증을 유발하고 고난을 준 사람들은 우리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게 된다.


넷째, 우울증은 뇌의 유익한 생리 기능의 부차적인 결과일 수도 있다는 해석이다. 우울증은 대개 슬픔에서 생겨나는 슬픔의 변종으로서 우리에게 유익한 메커니즘인 슬픔이 장애를 일으킨 것일지도 모른다. 슬픔은 인간의 매우 중요한 감정으로서 슬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애착의 형성일 것이다. 사랑이 깊고 넓어지려면 슬픔이 개재되어야 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고통을 느낀다. 어쩌면 슬픔에 대한 예상이 감정적인 애착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우울증 그 자체는 유익한 기능이 거의 없지만 우리가 지닌 감정의 폭은 그 극단들을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네 가지 관점 모두 우울증을 기피해야 할 정신병이 아니라 인간 감정의 스펙트럼의 한 부분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물론 책에서 소개된 중증 우울증 환자들 사례는 끔찍할 정도로 심각하다. 저자도 역시 세 차례에 걸쳐 심한 우울증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겪은 정신적 공황 상태를 두렵게 서술하고 있다. 그래도 책의 마지막 장은 희망이다. 자신을 파멸시킨 우울증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정신의 위대한 능력으로 보인다.


대체로 우울증 환자들이 정상인에 비해 주위 세계를 더 정확하게 본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자신을 사랑 받지 못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보다 진실에 가까울 공산이 크다. 프로이드도 “우울증 환자는 정상인에 비해 진실을 보는 눈이 더 날카롭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화적 관점에서는 적당한 낙관주의가 강력한 이점이 된다. 세상에 대해 긍정적이고 자기 강화적인 적당한 환상이 환경에 대한 적응성을 키우고 정신 건강을 증진시킨다. 그런 면에서 우울증을 지닌 사람들은 그런 환상이 결여된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은 헛되다. 나는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육체적인 개체성으로 인한 고립은 피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이루든 우리는 결국 죽게 된다. 이런 현실들에 굴하지 않고 인생의 다른 면들을 보면서 계속 추구하고 모색하고 꿋꿋이 견디는 것이 많은 우리들의 모습이고 진화에서의 선택적 이점이다. 그것도 우리들의 본능이며 또는 맹목적인 생명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울증 환자들은 세상을 명료하게 보기 때문에 맹목성이라는 선택적 이점을 상실하고 만다. 대신에 우울증 환자들의 색안경은 엷다.


우울증을 겪은 뒤 안정을 되찾은 사람들은 일상의 즐거움에 대한 감수성이 강해진다고 한다. 그들은 삶의 긍정적인 면들이 지닌 진가를 절실히 느끼고 쉽게 기쁨에 젖는다. 원래 너그러운 사람이었다면 우울증을 겪은 후에는 더욱 관대해진다. 모든 단점은 동시에 장점이기도 하다. 생산적인 우울증은 사람들은 유익한 방향으로 살도록 변화시켜 준다.


저자도 처절한 우울증의 경험을 통해 가난하고 짓밟힌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심없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우울증을 겪고 나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맞게 되는 모든 역경과 고통은 그 나름대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주고 싶은 말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고난은 유쾌하지 못하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경이나 고통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스스로 원해서 고통을 받는 사람은 없지만, 그러나 나를 찾아온 절망과 고통의 뒤에 남는 열매는 기적적이며 놀랍도록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것 또한 하늘이 주는 선물이다.


저자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우울증이 사라지는 행복한 날이 도래하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다. 만일 지구의 생명체들이 비가 내리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만일 우리가 기상 현상을 정복하여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게 만든다면 구름 낀 날들과 여름의 폭풍우를 그리워하지 않을까? 몇 개월 동안 음울한 날씨가 이어지는 영국에서 드물게 보는 태양은 적도 지방의 태양보다도 맑고 눈부시며 내가 최근에 느끼는 행복 또한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만큼 강렬하다. 나는 묘하게도 나의 우울증을 사랑한다. 우울증 체험은 좋아하지 않지만 우울증 그 자체는 사랑한다. 나는 우울증이 지나간 뒤의 나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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