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일기 / 안도현

샌. 2012. 11. 11. 13:10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 일기 / 안도현

 

 

고맙게도 지인으로부터 안도현 시인이 직접 서명한 시인의 근작 시집 <북항>을 선물 받았다. 시인이 서문에서 쓴 대로 '말과 문체를 갱신해 또다른 시적인 것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보이는 시집이다. 시인의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읽기 편하면서 가슴에 쉽게 감동이 닿았는데, 지금은 여러 가지를 이리저리 헤아려보게 된다. 은유가 많이 사용되어선지 시가 어려워졌다.

 

이 시 '일기'는 시집 맨 처음에 실려 있다. 속세를 떠난 은일(隱逸)의 고요함과 함께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려는 의지와 결기가 느껴진다. 생의 비의를 살짝 엿본 것 같기도 하다. 문득 도연명과 소로우가 떠오른다.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이 구절에 가슴 뭉클해진 건 여주에서의 내 삶이 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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