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공부도둑

샌. 2012. 11. 20. 14:06

<공부도둑>은 물리학자면서 녹색사상가인 장회익 선생의 70년 공부 인생 이야기다. 선생에게 공부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거나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 게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찾고 '앎'을 추구하며 즐기는 데 있었다. 그래서 본인의 생애를 앎과 숨바꼭질하며 살아온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또 공부꾼이라고도 했다. 우주의 보물창고에 들어가 학문의 정수를 골라 훔쳐내는 '공부도둑'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어보면 선생의 공부 방법은 남달랐다는 걸 알 수 있다. 양반가에서 태어나 집안 어른의 반대로 정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원리를 스스로 깨달았다. 당신 스스로 아인슈타인과 비교하는 데서 볼 수 있든 특별한 두뇌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에 가든 공부에서는 1등이고 수석이었다. 그런데 엘리트 의식이 전혀 없고 겸손하다. 도리어 남과의 경쟁을 불편하게 여긴다. 아니면 경쟁 상대가 없이 너무 출중한 여유인지도 모른다.

 

선생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교수가 되었지만 남과 경쟁관계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선생의 스승에 유진 위그너 교수가 있었는데 이분은 논문을 써놓고는 발표하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시간을 다투며 경쟁하는데 그분은 늘 '당신 다음에(After you)'를 실천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양보의 미덕은 선생도 닮은 것 같다. 학문적 성취보다는 이런 인격적 면이 더 존경스럽다.

 

선생의 신앙관도 짧게 나오는데 스스로 교회를 '졸업했다'고 말하는 게 흥미로웠다. 물론 이 말도 건방지게 들리지 않는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유지하되 교회와는 거리 두기 - 이는 지금의 나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기존 교회의 가르침은 너무 유치하고, 그렇다고 교회를 떠나기도 어렵다. 그 둘이 조화를 이루는 중간지대는 어디에 있을까?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유지하되 제도화된 기독교, 더 구체적으로는 '사도신경'을 강요하는 기독교와는 결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나를 길러준 교회를 배격하지는 않았고, 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 교회를 통해 나는 지금 내 신앙을 얻었으며, 또 그 안에서 영적 성장을 해오지 않았는가?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마치 초등학교와 비슷한 곳이라 생각했다. 이 안에서 배우고 자라지만 어느 정도 성숙한 후에는 이를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지적 영적 성장을 방해하리라는 것이다.'

 

선생은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인간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 많다. '온생명'이라는 새로운 생명 개념을 만들었다. 우리가 생명의 신비라고 하지만 생명 자체에서만 보니까 모호하기만 하다. 선생의 주장은 '생명의 신비는 생명체 밖에서 온다!'는 것이다. 생명을 보는 우리의 관점이 변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진정한 의미의 생명이 아니라 이것의 한 부분인 '낱생명'이다. 이것이 생명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것의 밖에 있으며 이것 못지않게 본질적인 존재인 '보생명'과 함께해야 한다. 이렇게 함께해서 진정한 의미의 생명 구실을 하는 그 전체가 바로 '온생명'이다.

 

움직이는 것만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뭇잎을 하나의 생명이라 여길 것이다. 나뭇잎이 병들었을 때 그는 제대로 진단을 하지 못한다. 뿌리와 줄기를 연관 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보는 생명의 관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 눈에는 살아있는 생명체까지는 잘 보이지만 이것과 연결되는 보생명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낱생명과 보생명이 합하여 더는 외부여건에 의존하지 않는 완결한 실체, 곧 온생명을 이룬다. 생명체 자체만 들여다보아서는 생명의 신비가 파악되지 않는다.

 

온생명은 나에게 생명을 보는 새로운 눈을 주었다. 온생명이 서양에서 나온 '가이아'와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가이아는 기존 생명관으로 지구 전체를 아우르는 생태적 관점에서 발전된 개념이지만, 온생명은 기존 생명관을 탈피한 생명의 본질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다. 앞으로 생명에 대해서 사색할 화두가 될 단어가 온생명이다.

 

온생명의 관점에서 생명을 이해한다는 게 어떤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 개체로서 10년, 20년 혹은 60년, 70년 전에 출생한 누구누구가 아니라 이미 40억 년 전에 태어나 수많은 경험을 쌓으며 살아온 온생명의 주체이다. 내 몸의 생리 하나하나, 내 심성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이 40억 년 경험의 소산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내 진정한 나이는 몇십 년이 아니라 장장 40억 년이며, 내 남은 수명 또한 몇 년 혹은 몇십 년이 아니라 적어도 몇십 억 년이 된다. 내 개체는 사라지더라도 온생명으로 내 생명은 지속된다. 지금 나는 오직 현역으로 뛰면서 온생명에 직접 기여할 기회를 누리는 존재가 되어 있다. 그러나 좀더 큰 의미의 생명 그리고 좀더 큰 의미의 '나'는 앞으로도 몇십 억 년 혹은 그 이상으로 지속될 온생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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