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선거의 추억

샌. 2012. 12. 23. 11:25

제18대 대선이 끝났다. 박근혜 후보가 51.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록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분이지만 축하를 보낸다. 당신을 지지하지 않은 14,950,303명이 있음을 잊지 말고, 낮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라를 이끌어 주길 부탁드린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여야 한다. 민생, 민생 하는데 그것보다 민본(民本)이 우선이다.

 

나에게도 선거에 대한 직접적인 추억이 있다. 어렸을 때 일이다. 4.19 직후 시행된 지방자치제에 따라서 면장을 뽑는 선거가 있었는데 선친이 거기에 출마한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는데 집안이 갑자기 사람들로 북적거린 정도와 선거 마지막 날 장면이 기억난다.

 

투표가 끝나고 선친은 졌을 거라며 술을 드시고 일찍 귀가해서 잠이 들었다. 개표 결과를 볼 필요도 없다고 포기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10여 표 차이로 당선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은 마치 마라톤 평원에서 달려온 병사와 같았다. 냉랭하던 집안은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그런데 잠시 후 급보가 왔다. 진 쪽의 선거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우리 집으로 쳐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다 이겼다고 봤는데 억울하게 졌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나와 동생들은 어머니를 따라 급히 이웃집으로 숨었다. 장독 깨지는 소리와 함께 한바탕의 소란이 폭풍처럼 지나갔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공무원에서 퇴직하신 뒤에도 선친은 또 다른 선거에 출마하셨다. 그때는 내가 공부를 위해 서울에 있을 때라 선거 상황을 옆에서 겪지는 않았다. 아마 어머니는 또 한 번의 홍역을 치렀을 것이다. 지금도 선거 얘기만 나오면 손사래를 치신다. 선친은 결코 정치적인 분이 아니신데 어찌 된 일인지 세 번이나 선거의 후보자가 되셨다. 입후보자를 가족으로 둔 사람은 선거가 얼마나 악몽인지를 안다.

 

그때에 비한다면 요사이 선거 풍토는 많이 좋아지고 깨끗해졌다. 금권선거라는 말은 거의 사라졌고, 네거티브나 지역주의에 기댔다가는 바로 역풍을 맞는다. 그만큼 유권자의 의식이 높아진 것이다. 대신에 SNS를 통한 비방이나 인신공격이 난무한다. 승패에 집착하는 것도 별로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젠 선거가 축제가 되어야 한다. 선거는 국민의 생각이 입후보자를 통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한마당이다. 선거의 카타르시스 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우리 사회의 모순이나 문제점도 드러난다. 선거는 그 모든 것을 용광로에 넣고 녹여내는 행사다. 건강한 사회는 소수의 목소리도 무시하지 않는다.  

 

축제에서는 이기고 지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치열하게 대결을 하지만 결과는 승복하고 인정해야 한다. 승자는 패자를 포용해야 하고, 때가 되지 않았으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보수나 진보나 독선은 배척되어야 한다. 나와 견해가 다른 쪽도 인정해 주는 게 민주주의다.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도 있지만, 땅을 가리키는 사람도 있다.

 

그대여, 너무 상심하지 마라. 나도 그날 화가 나서 밤늦게까지 혼자서 대취했다. 옛날 우리 집에 쳐들어왔던 상대편 운동원들도 역지사지로 생각하면 오죽 억울해서 그랬겠는가.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보니 다 사소한 에피소드들이었다. 역사는 반면교사도 필요로 한다. 바다에서는 늘 순풍만 부는 건 아니다. 그래도 세상은 느리게나마 진보하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마치 요트가 역풍에서도 지그재그로 몸을 흔들며 전진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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