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팔원(八院) / 백석

샌. 2013. 1. 3. 08:59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팔원(八院) / 백석

 

 

동장군 기승이 대단하다. 지난 12월은 45년 만의 강추위였다. 새해가 되니 그 기세가 더욱 맹렬하다. 이렇게 추운 겨울이면, 없는 사람들은 더욱 힘든 겨울나기를 해야 할 것이다. 난방을 돌리고 따뜻하게 지내는 게 영 죄스럽다.

 

옛날 고향 마을 친구가 떠오른다. 친구가 중학교 다닐 때 친구 집이 폭삭 주저앉았다. 시집간 딸 보증을 섰다가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재산을 모두 빼앗긴 것이다. 친구는 겨우겨우 중학교만 졸업했고, 초등학교에 다니던 여동생 둘은 서울과 대구로 식모살이를 나갔다. 그중 한 아이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웃에서 식모를 하며 돈을 모으고 있었다. 친구 모친은 딸을 보러 올 때면 우리 집에서 묵었다. 딸을 만나고 온 때면 저녁도 안 드시고 서럽게 우시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친구 여동생은 그때 고작 열 살이 좀 넘었을 것이다. 귀염을 받으며 자랄 어린아이가 남의 집 살림을 살아야 했다. 이 시를 읽으면 곱고 착하던 그 아이가 생각난다. 그 아이 손잔등도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을지 모른다. 나도 차 안 한구석에서 눈을 씻는 어느 한 사람이 된다.

 

오늘은 영하 18도까지 떨어졌다. 북쪽 겨울 추위는 더 대단했을 것이다.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 짓고 걸레 치다가 자성 어딘가에로 팔려가는 불쌍한 고 계집애가 눈에 밟히는 아침이다.

 

 

찬물에 걸레 빨다가 문득

고 계집애, 백석의 시에 나오는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 짓고 걸레 치던

고 계집애 생각이 났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 생활 /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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